1970년대, 병과 훈련소(M.O.S. School, Brown Barracks) 브라운 막사 기념 동판. 모든 UN사 장병들의 희생에 감사한 마음이다. 동판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다.(왼쪽 사진) 지금은 골프 세계에서 사라진 Metal Spike 골프화 밑창. 중학교 때, 키가 컸던 나는 태권도를 배웠다. 근무후 이런 신발을 신고 군내 곳곳을 활보하고 다닐 생각을 했다는 것이 지금 생각하면 끔찍하다. 군화 신고 돌려차기 하는 것도 무서운 일인데…
앞으로 할 이야기들은 실화이며, 또한 사랑의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남녀 간의 그런 달캉달캉한 이야기는 기대 안하시기 바란다. 이 이야기들은 남자이기에 언제, 어디선가 한 번쯤 경험해 보았을, 그래서 이제야 남자라고 혼자서 묵묵히 걸을 수 있는, 그런 위치에 다다른 남자들에게 바치는 사랑의 오마주(Homage)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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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운 일병 막사 (Brown Barrack)
군에서의 나의 두번째 싸움은 기본 훈련을 마치고 배치된 병과 훈련소(M.O.S. School)에서 발생했다. 내가 있던 군 막사 이름은 한국 전쟁 초기인 1950년 9월 6일, 개산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브라운(Brown) 일병 (미국 최고 훈장. 미 의회 훈장 수훈 The Medal of Honor recipient) 의 이름을 기리며 지어졌다. 막사 앞에 브라운 일병을 기리는 동판도 있었다. 그런데 같은 동료 중 하나가 시시때때로 나를 괴롭혔다. 흑인 들과 달리 백인들은 사람 피 말리게 괴롭히는 못된 버릇이 있다. 그런 친구들에게는 별 방법이 없다. 피하던지 아니면 무식하게 쳐박는 수 밖에는 없다.
#돌려차기와 중대장의 호의
그럴 기회가 왔다. 막사 앞에서 아침 열병식이 끝난 후 그 녀석이 의도적으로 내가 보란 듯이 입에 씹고 있던 껌을 그 동판에다 턱 하니 붙였다. 그 껌을 붙인 장소가 정확히 ‘KOREA(한국)’ 라고 새겨진 부분 이었다. 나는 그에게 껌을 떼라고 명했다. 나의 고함소리에 부대원들이 모두 우리를 주목했다. 빨강 머리 그 녀석이 어떻게 할래 하며 비웃었다. 그리고 던진 ‘떼놈 (Chink)’ 이라는 말. 그 순간 주위를 ‘쓱’ 둘러본 후의 나의 돌려차기가 그 녀석의 턱을 부셔버렸다. 바닥에 나뒹군 그는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뒤 나에게 덤벼들 자세를 취했으나 동료들이 사이에 끼어들어 말렸다.
서슬 퍼런 중대장에게 불려간 나는 자랑스러운 전사자의 동판에 씹던 껌을 붙이는 행위를 도저히 용납 할 수 없어 저지른 돌발사고였다고 해명했다. 월남전에서 전우들의 수많은 희생을 경험했던 중대장은 나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다시는 발길질 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오히려 그 ‘빨강 머리’는 Article 15 (군 규칙 위반) 제재를 받았다. 그 사건 이후 나에게는 ‘Swing Kick(돌려차기)’, ‘Bruce Lee (이소룡)’등 여러 별명이 붙었고 현장을 목격했던 여군들에게는 갑자기 엄청 인기가 좋아졌다. 어릴 적 여름방학 때 시골 외가댁에 내려가면 외할아버지는 우박 빗속에 도랑 물길을 열기 위해 삽을 들고 논으로 나가셨다. 비가 오면 물길을 터 주어야 한다. 그 누구도 내 대신 해주지 않는 일은 내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나는 그렇게 내 발을 쇠창으로(metal spike golf shoes) 무장한 채 훈련소 생활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후기 (Epilogue)-우리들의 영웅-준 리
10월, 막바지 가을 단풍 구경을 위해 번잡한 도시에서 2시간 거리인 미들버그로 갔다. 따끈한 커피 한잔을 손에 들고 부유한 마을을 여유 있게 산책하다 보니 벌써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음을 느꼈다.
해는 벌써 중천, 서둘러 블루릿지 산을 바라보며 좁은 시골길을 테슬라로 달렸다. 창문을 살짝 여니 신선한 공기가 도시의 그것과 사뭇 달랐다. 나지막하고 이끼 자욱한 돌담들이 정겨운 모습으로 가을 나들이를 반겨주는 듯했다. 미들버그에서 50번 도로를 10여분 더 달리니 완연한 시골 모습에 딴 세상이었다. 업퍼빌(Upperville) 이라는 우표 만큼이나 작은 마을을 지나는데 ‘태권도’ 라는 큰 한글 사인이 붙은 도장이 나왔다. 아니, 이 시골에 누가 있다고 도장을 차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생각하니 내가 처음 미국에 왔을 때는 태권도 도장이 없었다. 도시에 있는 무술도장들은 모두 ‘쿵푸’ 나 ‘가라테’ 라는 영문 표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각종 미디어에 태권도 도복을 입은 소년이 “아무도 날 해 칠수 없어! (Nobody bothers me!)” 라며 당당히 소리치는 광고가 나왔다. 이준구 사범님이 여기저기에 태권도 도장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그후의 이야기는 모두가 아는 바이다. 때로는 한 사람의 노력으로 인하여 세상이 변한다. ‘쿵푸’ 와 ‘가라테’ 는 사라지고 ‘태권도’ 천하가 된 것이다. 때로는 온갖 수식어와 형용사를 동원해도 마음속의 참 뜻을 전달하기 힘들 때가 있다. 이제는 고인이 되신 이준구 사범님 그분이 많은 나이에도 팔 굽혀 펴기를 시범하며 젊은이들을 호령하던 모습을 다시 보고싶은 내 마음은 과연 나 뿐일까? ‘감사합니다 그리고 당신 때문에 태권도와 우리 모두 자랑스럽습니다’라는 이 한마디 헌사를 진심으로 그분에게 바친다.
<다음에 계속>
(jahn8118@gmail.com)
<
Jeff 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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