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떨어짐이, 떨어짐이 아니었음을 깨닫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
1977년 미군으로 모교를 방문하고 찍은 동창들 사진.
앞으로 할 이야기들은 실화이며, 또한 사랑의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남녀 간의 그런 달캉달캉한 이야기는 기대 안하시기 바란다. 이 이야기들은 남자이기에 언제, 어디선가 한 번쯤 경험해 보았을, 그래서 이제야 남자라고 혼자서 묵묵히 걸을 수 있는, 그런 위치에 다다른 남자들에게 바치는 사랑의 오마주(Homage)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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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부모님 두 분 간의 모래시계는 종지부를 찍어도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는 거부할 수 없음을 우리 식구는 체험했다.
#셋방살이와 재래식 화장실
미국에 계신 아버님 뒷바라지 하느라 기울기 시작한 집안 경제는 급속히 나빠졌다. 어머니와 세 형제는 아방궁 같던 집을 떠나 남의 셋방살이를 하는 신세로 전락한다. 사춘기 고등학생이던 형은 혹시 친구 누군가 자신을 알아볼까 그 셋집 쪽문을 살며시 열고 밖을 망보았다.
중학생이던 나는 뒤바뀐 삶을 받아들였다. 수세식 화장실과 목욕탕이 있던 집에서 재래식의 전환은 참으로 적응하기 힘들었다. 특히 주인집에는 같은 나이 또래의 두 딸들이 있었는데 바쁜 등교 시간에 하나뿐인 야외 재래식 화장실 앞에서의 마주침이 정말 싫었다. 그런데, 형은 언제인가 풍요로운 미국에 간다는 꿈에 그리고 아버지 사랑을 독식했던 여동생은 아버지와의 재결합을 고대했던 반면 나는 그런 꿈이 없었다.
#반장·빼앗긴 완장
반장이었던 나는 학교 시험 잘 보고 담임선생님 지시 잘 따르며 오후 늦도록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것이 낙이었다. 때때로 도서관 유리창 너머 빈 운동장을 멍 하니 바라보면서 부재중인 아버님 그리고 그분 뒤치다꺼리 하느라 정신이 없는 어머니가 걱정되곤 했다.
학창시절 나는 조용하고 착한 학생의 전형이었다. 얼마나 내 성격이 변했는가는 내 스스로도 놀랠 지경이다.
중1 때까지는 담임이 우리 집을 찾아 방문했고 우리가 셋방으로 이사한 후인 중 2때는 어머니가 담임을 찾아 교무실에 오셨다.
중3이던 어느 여름날, 아침 조회가 끝나고 담임선생님이 교무실로 나를 호출했다. 그리고 아무 다름 말씀 없이 “내일부터 ***가 반장이다, 알았지!” 하셨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렇게 잠시 서 있는데… “나가봐” 하셨다.
교무실에서 나와 복도에서 또 한참을 멍 때렸다. 다음날 조회 시간. 나 대신에 새로 임명된 반장이 일어나 선생님에게 인사를 시켰다. 잠시 반 아이들이 동요했다. 그리고 이유를 모르는 나는 ‘쪽팔림’ 당한 아이 마냥 고개를 떨구고 책상만 응시했다. 그 담임은 자기 성질을 못 이겨 시계줄 풀고 학생 얼굴을 가격하던 사람이었다. 아무런 배려의 맘이 없던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마치 폭행을 당한 기분이었다.
하교 길에 작은 돌 하나를 잘못 걷어차는 바람에 엄지가 아파왔다. 부엌에서 밥 차리는 어머니의 뒷모습이 안스러워 아무 말 못했다. 그날 저녁 식사 때 어머니의 “오늘 뭐 했니?” 라는 질문에 대답 대신 수저로 밥을 내 입에 처넣었다.
그리고 몇 십 년 후. 한 가정의 가장이 된 아들에게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아비야, 너 반장 그만 두었을 때, 그 때가 참 마음 아팠다….” “아이, 엄만 반장이 뭐라고 참나.” “그때, 가정형편이 조금만 됐어도….” 한 번도 말씀 안 드렸는데 어떻게 아셨을까?
#반항아와 소아마비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교과서를 파는 대신 온갖 문학서적들을 마구잡이로 읽어 나갔다. 그 우울했던 시절, 감수성 폭발하던 나이에 내가 그 좁은 유리 터널을 빠져나가 지겨운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문학 세계, 팝송, 그리고 삼류 극장에서 보는 미국영화뿐이었다. 카뮈 (Camus)가 누구인지,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가 무엇을 노래하는지 아무 상관없이 읽고 불러댔다. 내 것이 아닌 것에 심취했다. 우리 삼형제에게 부재중인 아버지에 대한 반감이 쌓이기 시작했던 시기가 이때였다.
같은 반에는 소아마비로 인해 목발을 하고 다니는 학생이 있었다. 떡 벌어진 상체와 달리 항상 끌려 다니는 두 다리는 맥없이 가늘었고 두꺼운 신발 창은 턱없이 무거워 보였다. 그에게는 친구가 없었다. 내가 반장에서 밀려난 후부터 왜인지 그와 같이 하교 하면서 버스 정류장 까지 같이 걷게 되는 일이 많아졌다.
골목길에 이층 탁구장이 있었는데, 내가 무심코 “너 탁구 칠래?”하는 말을 하고는 속으로 ‘아차 실수’ 했다. 그 녀석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한번 해보자” 하며 앞장섰다.
그 녀석은 한 목발에 온 몸을 맡기고 다른 한 손에 탁구채를 들고 수없이 쓰러지면서도 또 일어나 나의 탁구 상대자가 되어 주었다. 무수한 쓰러짐(fallen), 그러나 다시 일어남이 없었다면 또 다른 쓰러짐도 없었을 터이지만 녀석은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강력한 스매싱를 날리고 싶은 충동이 일 때마다 나의 쪽팔림이 떠올랐고, 땀범벅이 된 녀석의 얼굴에서 인성을 배웠다. 반세기가 되어가는 지금 딱 하나 보고 싶은 중학교 동창은 바로 그 녀석이다.
#공고 입학
나는 고등학교 입시 때 상당한 갈등을 했다. 어머님이 교무실에 찾아오시고, 고등학교 진학에 대해 담임과 의논했다. 그 자리에서 어머니의 가정 형편을 듣고 있던 선생님은 강력하게 어느 공고를 추천했다. 내 실력이면 입학 가능하며 장학금도 많고, 졸업과 동시에 취직도 잘된다고 침 튀어 말했다.
사실, 공고나 상고는 죽기보다 가기 싫었다. 그런데 의자 모퉁이에 앉아 계시던 어머니의 시선이 서있는 나를 쳐다보셨다. 아~ 그 늦은 오후 그 교무실 창살로 스며들던 그 햇살이 왜 그리도 싫던지….
고등학교 입시 시험을 치르고, 발표 날 오후에 교정을 찾아갔다.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기쁨과 슬픔의 교차로이며 잔인한 갈림길이었던 그곳에서 내 이름 석자를 흰 종이 위에서 확인하고는 교정을 빠져 나왔다. 원치 않던 학교에 붙고 나니 오히려 마음만 무거워졌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발걸음이 이곳저곳을 방황했다.
오후 늦게 집에 오니 형이 “너 학교 가서 확인했어?” 하고 묻는다. 대꾸 대신 방 한 구석에 누웠다. 여동생이 답했다 “엄마가 아침 일찍 일어나서 가 봤어.” 나는 돌아누웠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형이 밉살스러웠고 어떻게 하든 그 방구석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모래시계는 모래알 없이 그리고 그들의 떨어짐 없이는 아무 의미가 없는 유리병이다. 모래알들의 떨어짐, 그 수많은 추락들이 모여서 하나의 의미를 갖는다.
나에게도 수많은 추락의 순간들이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한때 현재의 어려움, 그리고 앞날의 두려움에 몸을 떨며 세상을 등진 듯 살기도 했었다. 떨어짐이 떨어짐이 아니었음을 깨닫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
<
Jeff 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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