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아버지
아버님은 모래시계와 같은 삶, 그리고 그런 사랑을 하시고 돌아가셨다. 자식인 나의 시각에서 그분의 모든 인간관계는 슬픈 인연이었다. 그분의 마지막 길이었던 장례식에서도 친구는 달랑 한 분, 참으로 썰렁한 길이었다. 그 분의 꽉 차 있어보였던 그 수많은 시간들, 그리고 사람 관계들은 유령같이, 아니 아침 안개 걷히듯이 어디로 사라졌을까?
모래시계의 출발점은 꽉 찬 모습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비좁은 작은 통로로 흘러내려, 마지막 한 알맹이마저 없어지는 그 순간, 시간도 멈추고 일순간 종말을 알린다. 어린 두 형제 아이들을 안방 중앙에 세워놓고 아버님은 ‘국민교육헌장’을 큰소리로 낭독하라고 명했다. 때로는 회초리, 때로는 가죽 벨트를 오른손에 검어 쥐시고는 탁자 위, 모래시계를 돌려서 시작을 알렸다. 우리 둘은 잘 외웠으나 중간에 막힐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그 모래시계를 훔쳐보며 떨었다. 시간이란 상황에 따라 엄청난 공포의 대상이다.
#콩깍지
아버지와 어머니의 만남은 한 편의 드라마 같았다. 한국전쟁 당시 육군 장교였던 아버님은 북한군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시다 어느 산간 논두렁에 버려졌고 지나던 농부에게 발견되어 소달구지 뒤에 실려 육군 야전병원에서 극적으로 목숨을 건지셨다.
북한군의 구둣발과 개머리판에 의해 갈비뼈가 으스러지고 총상으로 콩팥 하나를 제거하는 큰 수술을 받은 후에야 간신히 살아날 수 있었다.
나의 첫 아버님에 대한 기억 중 하나가 웃통을 벗은 그분의 몸에 거미줄처럼 엉켜 붙어있는 수술 자국들이었다. 어린 아들의 질문에 상처를 안고 사는 당신은 단 한마디 설명이 없었다. 속된 말로, ‘빨갱이’ 탓도 안하셨다.
그 육군 야전병원에서 환자와 간호사로 두 분은 운명적 만남을 가졌다. 내가 늘 어머니에게 어떻게 아버지 같은 남자를 좋아하게 됐냐고 물으면, 그 분은 긴 말씀 없이 눈에 낀 콩깍지 탓을 하셨다. Love is blind.
#찢어진 결혼사진
그렇다. 사랑이란 최면술은 우리 모두를 잠시나마 시각 장애자로 만든다. 아버님은 퇴원 후에, 당시 경찰 간부였던 큰 아버지를 시켜 어머니에게 적극적인 구애를 했다 한다. 모래시계는 이미 종점을 향해 달리고 있건만….
나는 두 분 결혼사진을 본 기억이 없다. 추측 건데, 폭력적이셨던 아버지의 성격을 미루어 아마도 그 수많은 부부 다툼 중에 아버지가 찢어버렸을 확률이 높다. 언제인가, 어머니에게 왜, 아버지는 화를 주체 못하시는지 물어본 기억이 있다. 처음에는 무척 로맨틱한, 그리고 남자다운 면이 있었다던 아버지.
“아범아. 네 아버지, 출혈이 너무 많았어. 여러 번 재수술도 했고. 수혈을 많이 했지. 수혈 많이 한 사람은 성격이 변한다더라….”
그런가? 그렇겠지. 수혈 탓이야. 그 순간, 우리 형제들의 ‘욱’ 하는 성격도 아버지 탓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다른 모르는 누군가를 탓하는 것이 편하니까.
#상주 외가댁
50년대 그리고 60년대, 입에 풀칠이라도 하도록 세 어린 자녀를 둔 부모님을 도운 곳은 상주의 외가댁이었다. 매년 수확 철이면 용산역에 나가서 외가에서 올라온 쌀가마니를 찾아오고, 한 입이라도 덜기 위해 둘째였던 나는 시골 외가댁에서 매년 여름을 보내야 했다. 그렇게도 어렵던 우리 살림은 60년대 말 수출 붐과 함께 마치 모래시계가 뒤집어지듯이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우리는 용산에 일본식 정원과 연못이 있는 큰 단독주택으로 이사했고 주위 옆집들은 김지미, 대림산업, 아모레 화장품 그리고 이후락 정보부장이 사는 그런 동네였다.
집에는 시골에서 올라온 식모, 대학생 가정교사가 오가고 우리는 기사가 운전하는 미제 자가용을 타고 충북(충북 농공 주식회사)과 구로공단에 있던 아버님의 공장을 둘러보기도 했다. 다시 말해, 완전 부르주아로 탈바꿈한 것이다.
#미국으로 떠나신 아버지
아버님의 큰 공장에는 미싱에 단발머리를 처박고 정신없이 페달을 밟아대던 무표정한 나이 어린 여종업원들 그리고 매서운 눈초리에 흰 면장갑을 낀 남자 작업반장들의 살벌한 분위기, 벽면 사방에 붙어있던 수많은 구호들이 마치 모래시계 유리 안에 갇혀서 영원히 못나오는 모래알들 같았다.
그리고 70년 초 어느 날, 갑자기 끊어진 바이어들의 오더를 잡겠다며 아버지는 우리 삼 남매에게는 오고 간다는 말씀도 없이 수출을 목적으로 미국으로 떠나셨다. 그렇게 떠나신 그분은 다시 고국 땅을 밟지 못하셨다.
사장이 부재인 사업은 고스란히 어머니 몫이 되었다. 아버지는 수출한다며, 미국 캐탈로그를 어머니에게 보내서 그와 똑 같은 모양의 물건을 미국으로 만들어 보내라고 명했다. 우리 집 방들은 갑자기 온갖 모양의 샘플들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그 자금조달을 위해 강남과 강북에 있던 땅들을 파셨다. 그런데 잘 돼야 하는 수출은 오히려 안 좋아지기 시작했고, 집안도 기울기 시작했다.
#이혼-인연의 종착역
팽팽하던, 위아래 칸의 모래시계 균형이 무너진 것은, 어느 날 어머니가 이혼장에 도장을 찍어 미국으로 보낸 그 순간이라 생각된다. 이유는 이혼을 해야 아버님이 미국 시민권자 하고 결혼하고 우리 식구들을 미국으로 데려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정략결혼은 들어봤어도, 정략 이혼은 못 들어본 나는 부모님들이 잘 알아서 하리라 믿었다.
얼굴 한 번도 보지 못한 새어머니(미국 시민권자)에게 어머니는 없는 돈을 모아, 귀한 달러를 부쳤다. 그때 어머니 심정이 어땠을까? 인생을 살다 보면, 죽도록 싫은 순간들이 있다. 그런 순간이었을까? 한국에 그렇게 버려져 있을 수도 있다는 걱정은 없었을까? 남편이 변심할 수 있다는 우려는 없었을까?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당신의 심정을 토해내 말한 적이 없다. 다만, 아들로서 추측하건데, 워낙 여자관계가 깨끗했던 아버님을 믿으셨거나 아니면 그래도 한국에 있는 새끼들을 버리진 않겠지 하는 바람이었을 거라고 생각된다. 돌이켜 보면 세월이 수없이 흐른 지금, 그 이혼장이 두 분의 결혼과 슬픈 인연의 종착지였다.
모래시계는 멈춘다고 자의적으로 스스로 뒤엎어지지 않는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만이 빈 공간에 남아 죽은 듯 갇혀 있다.
<다음에 계속>
(jahn8118@gmail.com)
<
Jeff 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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