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화요일자 교육섹션에 ‘건국의 아버지들’ 시리즈를 연재한다. 이 시리즈에서는 뉴저지와 워싱턴 지역을 오가며 활동 중인 이종권 씨가 한글로 번역한 역사서 ‘The Book of the Founding Fathers’에 수록된 미국의 정신과 미국 건국에 가장 의미 있게 공헌한 인물, 독립이라는 꿈을 품고 키웠던 용기 있는 지도자, 세계 최초의 연방 민주주의로 실현해낸 사람들 35인을 조명한다. 존 애덤스, 조지 워싱턴, 벤자민 프랭클린, 토마스 제퍼슨, 알렉산더 해밀턴, 제임스 매디슨, 조지 메이슨 등 미국에 사는 우리가 필수 교양으로 꼭 알아두면 좋을 인물들이 매주 1명씩 소개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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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릭 헨리의 약력
△1736년 5월 29일 버지니아 하노버 카운티에서 출생 △1760년 변호사 개업
△1765-75년 버지니아 하원의원 △1774-76 년 버지니아 애국회의 회원
△1774-75년 대륙회의 대의원 △1776-79년 버지니아 최고행정관
△1780-84년 버지니아 의회 의원 △1784-86년 버지니아 최고행정관
△1786-90년 버지니아 의회 의원 △1788년 버지니아 헌법비준회의 대의원
△1799년 6월 16일 버지니아 샬럿 카운티에서 영면
혁명기간 동안 가장 유명한 웅변가였던 패트릭 헨리는 식민지 버지니아인들에게 자유의 불꽃을 댕긴 드라마틱한 연설을 시전했다. 토마스 제퍼슨에 따르면 그것은 “그 무엇보다도 혁명의 정신을 드높게 고양시켰다.”
1765년 버지니아 하원 의사당에서 헨리는 용감하게 인지세법 반대 연설을 감행함으로써 식민지 진영의 포문을 열었다. 1775년에는 렉싱턴과 콩코드 전투 일주일전 민병대의 무장을 호소하는 불멸의 웅변을 토해냈다. “나에게 자유를 주시오. 아니면 죽음을!”
농부로서 그리고 상인으로서 실패를 거듭했던 헨리는 24세에 법학을 공부하여 변호사로서 빠르게 명성을 얻었다. 그는 1763년 ‘신부의 주장’ 사건(Parson’s Cause)을 통해서 버지니아 법을 무력화하려던 (영국)왕을 상대로 법적 승리를 거둠으로써 버지니아에서 명성을 획득했다.
1765년 버지니아 하원에서 그는 인지세법에 대한 소식을 듣고 자치 징세권을 포함하여 식민지인의 권리에 관한 다섯 가지 대담한 결의안을 열화 같은 웅변으로 선언하자 “반역이다!”라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헨리의 강력한 연설로 인해 식민지에서 인지세법에 대한 저항은 더욱 거세졌고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갔다. 버지니아에서 그는 총독보다 더욱 큰 실권을 갖고 있었다.
1차 대륙회의에서 헨리는 대륙협의회(Continental Association)결성을 강력히 지지했다. 대륙협의회는 영국산 수입상품 불매운동을 목적으로 결성된 식민지간의 연합체이다.
헨리가 혁명 기간 중 가장 유명했던 연설은 했던 것은 리치몬드에서 열렸던 버지니아 혁명회의에서였다. 그는 민병대의 즉각적인 무장을 제안하며 연설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점잖으신 분들은 평화, 평화를 외칠 것입니다. 그러나 평화는 없습니다. 사실상 전쟁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목숨은, 그리고 평화는... 쇠사슬에 묶인 노예가 되어서야 얻을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소중하고 달콤한 것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 당치도 않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어떤 길을 선택할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나로서는, 나에게 자유를 주소서. 아니면 죽음을!” 회의는 즉각 그의 제안을 승인했다. 1775년 대륙회의에서 헨리는 대륙군으로 싸우고자 했다.
그러나 영 군인 체질이 아니어서(그의 친구 워싱턴이 동의했다.) 이내 전역했다. 버지니아 애국회의에서 그는 버지니아 헌법과 권리장전 초안 작성에 기여했다. 1776년 7월 5일 버지니아의 초대 수장이 되었고 법적 한도인 3년간 자리를 지켰다.
혁명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음에도 헨리는 죽는 날까지 버지니아인이었다. 헌법안이 비준을 위해 버지니아에 송달되었을 때 그는 반대했다. 헌법이 지나치게 많은 권력을 연방정부에 부여함으로써 주와 시민 개개인의 본질적인 권리를 박탈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헌법에 반대하며 권리장전을 추구했던 그의 투쟁은 전 식민지 대중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리하여 권리장전 수정헌법의 조기 채택에 공을 세웠다.
●번역자 이종권 씨는
서울 상문고와 한국외국어대학 영어과, 동대학원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와 캔사스 대학 대학원을 졸업한 프로 번역가다. 외국어대학교와 경인여대에서 영어 강사를 역임했으며 캔사스 대학에서 한국어 강사, ‘뉴욕불교’ 편집장으로도 활동했다. 현재 뉴저지에서 출판사인 프론티어 퍼블리케이션스를 비롯 보림식품, 뉴욕산삼컴패니 등을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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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권 / 번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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