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초저녁 델리시티 바트 스테이션 뒤의 언덕 미션 스트릿은 추웠다. 바람도 추위가 싫은지 빠르게 불며 지나갔다. 낮이었다면 멀리 아래로 오션 비치의 푸른 바다도 보였겠지만 이미 어두워진 산 아래는 수많은 집, 아파트에서 나오는 불빛들이 어둠 속의 반딧불 같았다. 그 시간에도 많은 차가 미션 스트릿의 고개를 넘고 존델리 블루버드를 오르내렸다. 아내는 버스 정류장 방풍막 안에서 얇은 포대기로 몇 번을 둘둘 감은 딸아이를 가슴에 품고 겉옷으로 감싸 안고 웅크리고 앉아 있다. 6개월 만에 조산으로 태어난 아기는 3개월 동안 인큐베이터에서 자라고 퇴원한 지 두 달이 되었는데도 아직 너무 작았다.
스탠포드 병원에서 퇴원할 때 담당 의사는 산마테오에 있는 소아과를 지정해 주었다. 자동차가 없던 우리는 델리시티 웨스트레이크에서 산마테오의 소아과까지 가기 위해 세 번 버스를 바꿔 타야 했다. 아파트에서 바트 스테이션, 바트 스테이션에서 미션 스트릿, 미션에서 산마테오까지. 나는 그때 체험으로 알았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로스앤젤레스까지는 1시간이면 갈 수 있지만, 델리시티에서 산마테오는 3시간 넘게 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오랜 투병으로 보행이 자유롭지 못했던 아내는 버스를 오르내릴 때도 부축이 필요했다. 한 달에 두 번 병원에 가는 날은 직장에서 오전 근무만 하고 집에 와 아내와 아기를 데리고 버스를 타고 병원에 갔다. 1시 반에 아파트를 나서면 4시 반 병원 약속에 가까스로 갈 수 있었다. 답답할 정도로 융통성이 없는 나였다. 왜 그때 아파트 근처의 소아과로 바꾸어 달라는 요청을 안 했는지 모르겠다. 진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도 마찬가지로 버스를 세 번 갈아타야 했다.
그날은 억세게 운이 없던 날이었다. 어렵게 소아과 진료실에 도착했는데, 병원 문은 잠겨 있었다. 미션 스트릿에서 버스 운전사가 우리를 못 보고 지나쳐버려 다음 차를 타니 약속 시각보다 30분 넘게 늦었기 때문이었다. 돌아오는 길은 몹시 쓸쓸했다. 이 길을 어떻게 왔는데 의사도 못 만나고 돌아가야 하나… 산마테오에서 버스를 타고 델리시티 미션 스트릿에 도착하니 주위는 깜깜하고 바람은 칼바람이었다. 얼굴을 할퀴고 가슴속을 후비고 지나갔다. 바트 스테이션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려야 했다. 방풍막 안의 아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를 몹시 원망하고 있겠지. 결혼식 때 자동차 다운페이를 해주겠다는 처가의 제안을 나는 거절했다. 없는 자의 자존심이었다.
방풍막 안은 등까지 꺼져 아내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양팔을 펴 안무도 하며, “저 많고 많은 자동차 중에 내 차는 어디에~ 저 많고 많은 건물 중에 내 집은 어디에~, 어디에 있을까.. 날 찾고 있을까 숨지만 말고, 피하지 말고 날 반겨 주세요~” 아내의 얼굴을 살피며 내 손동작에서라도 웃음을 발견했으면 하는 위문 공연이었지만 공연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아내의 손등이 눈가를 스치는 것을 나는 보았다. 40년 전 내 신혼의 어느 하루였다.
결혼한 지 2년 만에 회사에서 천 달러를 가불하여 6백불짜리 탱크 같은 올즈모빌 델타88을 사고, 360불로 바퀴를 갈았다. 철저하게 비밀리에 진행하고, 저녁에 집에 와 아내의 손을 밖으로 이끌었다. 내 가슴을 활짝 펴고 아내에게 우리 차라고 소개했다. 못 믿겠다는 뜻인지, 이게 낡은 고철덩이지 무슨 자동차냐는 뜻인지 묘한 표정의 아내는 차에 타라는 나의 요청을 완강히 거절했다. 억지로 아내와 딸아이를 옆자리에 구겨 넣고 드라이브를 시작했다. 차는 요란했지만 묵직한 승차감이 나를 뿌듯하게 했다. “어디서 이런 걸 차라고…” 아내는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애써 참는 아내의 실미소를 보았다. 그 후로 나의 차는 진화를 거듭했다. 올즈모빌 오메가, 프랑스 차 푸조, 스웨덴 차 볼보… 모두 중고차였지만 상당한 신분 상승이었다.
햇볕이 잘 안 들어 원베드룸 중에서도 월세가 조금 저렴했던 아파트에 살았다. 겨울내내 컴컴하던 아파트에 봄이 되자 손바닥만 한 햇빛이 리빙룸에 들어와 앉았다. 이제 말을 갓 배우기 시작한 딸 아이가 손가락으로 햇빛을 콕콕 찌르며 ‘이게 뭐지?’를 반복하며 뱅글뱅글 그 주위를 돌았다. 그렇게 5년을 산 후 나는 2 베드룸 콘도 주인으로, 얼마 후 3베드룸 타운하우스로, 그리고 단독주택으로… 내 집들도 신분 상승을 했다.
자동차 한 대만 있었으면 하고 바랐던 때가 있었다. 정원이 있는 작은 집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게 어둠의 터널을 지나고 거칠고 뜨거웠던 허허벌판 광야를 지났다. 어둠 속에서 두려울 땐 기도했고 광야에서 외로울 땐 노래를 불렀다. 어두운 길을 걸은 후에 햇빛조차 소중함을 알게 되었고 메마른 땅을 지나 보았기에 작은 숲길과 얇은 시냇물 소리에도 감격 할 수 있다. 바랐던 것을 갖게 되었고 꿈꾸던 것을 얻었다. 살다 보니 그 모든 것들이 내게 다가왔고 주어지고 얻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지나온 날들이 아주 고마울 뿐이다. 찰나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일이 있었고 오랜 세월이었다고 하기엔 빨리도 지나가 버린 시간이었다. 살아온 날들이 꿈을 꾼 것 같기도 하고 기적 같기도 하다. 오늘도 70, 80마일로 달리는 자동차들 속에 줄 서 달려도 안전하게 집으로 들어서는 것… 기적, 우리는 매일매일 기적처럼 살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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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용식 (공인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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