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즉위 후 평범한 백성들의 삶에 큰 관심을 가졌다. 재위 15년이 되자 백성 중에 중죄로 감옥에 장기간 갇혀 있는 죄수 중에서 혹시 억울하게 갇혀 있는 죄수가 있는지 알아보게 하였다.
당시에는 형사 피의자가 잡혀 오면 “죄인이 진실을 토설할 때까지 매우 쳐라” 라는 말과 함께 고문을 가하는 것이 드물지 않았고 피의자는 고문으로 죽든지 죄를 자백해서 죽든지 어차피 죽음을 피할 수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보고된 사건 중에 특이한 경우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황해도 곡산에 살고 있던 여자 약노(藥奴)가 주문을 외워 사람을 죽인 혐의로 투옥된 사건이다. 약노는 처음에는 살인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가 말을 바꾸어 살인했다고 자백하고 10년간 옥살이를 하고 있는 중이었고 그 진위를 정확히 밝혀내지 못한 상태에서 형조는 이 사건을 살인죄로 처리하려고 했다. 이에 대해 세종은 주문으로 살인을 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며, 지금의 청와대 사정수석쯤 되는 좌부승지 정분을 파견해 진상을 다시 조사토록 했다.
정분은 약노에게 마당의 개와 닭에게 주문을 걸어 죽여보라고 했고 약노가 주문을 외웠지만 개와 닭은 죽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약노 자신이 스스로 유죄를 자백하며 빨리 죽여 달라고 애원했다.
정분이 세종의 말을 전하며 안심시키자 약노는 비로소 크게 울며 “저는 솔직히 주술로 사람을 죽게 할 수 없습니다. 사실은 그날 그 사람에게 밥을 먹여주었는데 그 사람이 원인을 알 수 없게 갑자기 죽어버리자 저는 살인 용의자가 되었고 주위 사람들이 제가 죽였다고 고발했습니다. 그러자 관에서 여러 차례 태형을 가해 어쩔 수 없이 제가 살해했다고 거짓 자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죽은 사람이 독약이나 흉기로 살해당한 흔적이 보이지 않자 어떻게 죽였느냐고 다시 취조했고 고문과 매를 견디지 못해 주술로 죽였다고 거짓 자복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다시 사실을 고해봐야 태장을 당할 것이 뻔하고 어차피 죽기는 마찬가지인데 매질을 당하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이 나으니 목을 베든 교수형에 처하든 빨리 죽여주십시오." 라고 털어놓았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세종은 그녀를 심히 불쌍히 여겨 재조사해 보았고, 약노는 단지 어떤 사람이 죽을 때 같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무려 10년간 감옥에 갇혀 있었고, 그 사이에 “문초하는 형장을 11차례나 맞았으며, 의금부에서 또 15차례나 형장을 당했던 것”을 알게 되었다. 세종은 다시 한 번 최종 조사를 명한 뒤 약노를 무죄 방면하며 그녀를 치료하여 제 집으로 돌려보내고 돌아가는 동안에 먹을 것을 넉넉히 주도록 지시하였다.
실제 세종은 어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자신 곁에 있던 재상이나 집현전 학사보다는 고아나 과부, 감옥의 죄수나 노비처럼 힘없고 약한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일까를 먼저 생각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종대왕은 국방과 천문학, 농사법 등 과학 기술적인 지식 뿐 아니라, 음악, 미술, 언어학, 유학 등 인문학적인 분야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보인 르네상스적 천재로서 세계의 어느 군주보다 뛰어난 왕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에 그치지 않고 억울한 백성들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는 자비의 군주로서 우리의 역사에 가장 자랑스러운 성군이다.
훈민정음의 서문을 읽어보면 한글을 창제한 목적이 자신의 죄가 어떻게 기록되는지 백성 스스로 알게 해서 약노와 같은 무고한 백성이 애매하게 죽는 것이 없게 해야 하겠다는 세종의 이런 뜻이 잘 나타나 있다.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끝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것을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다.”
음운학적으로 가장 완벽하고 지식정보화시대에서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한글을 창제한 데에는 이렇게 세종대왕의 깊은 백성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한글을 2세에게 가르치고 한국의 문화와 전통을 전달할 때 세종대왕의 이러한 마음 깊은 사랑을 같이 전해주어 성인이 되어서도 주위의 가난하고 고통받는 동포들에게 도움을 주고 약자를 배려하는 미주 한인을 양성하는 인성 교육기관으로서의 한국학교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
이기훈 / 재미한국학교 워싱턴 협의회 이사장>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