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70년대에 한국에서 꽤나 잘 나가는 직물 디자이너였다. 서울시청 앞 플라자호텔 뒤편 북창동에 좀 규모가 큰 화방을 하나 차려 놓고 주로 홍익대 미대 출신 몇 명을 데리고 직물 디자인을 해서 국내외에 팔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의 유명 의류회사들이 판촉을 목적으로 하는 LA 매직쇼, 뉴욕 NAMSB Show 등으로 출장을 갔고 그 곳에서 꽤나 유명한 브랜드 네임 회사 이곳저곳을 찾아가기도 또는 불려가서 옷감 디자인을 팔곤 했다 그러나 실패. 간이 부어서 겁 없이 미국에서 회사를 차렸다가 망했다.
그 후 처갓집 식구들이 모여 사는 워싱턴에서 살게 되었다. 그러나 워싱턴은 LA, 뉴욕 등과 달리 섬유제품 도매장사를 할 수 있는 곳이 못 되었다. 그래서 틈새시장을 찾았고 당시 막 붐이 일어나는 캐러비안 해안을 도는 크루즈 배들이 정박하는 항만 입구에 있는 기념품 상점에 한국에서 의류 가죽 제품을 수입해서 그들에게 물건들을 공급해 주는 도매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실패. 잘 나가다가 허리케인 덕분에 가게들과 함께 망했다.
날씨가 이제 가을로 들어선 것 같다. 옷걸이에서 여름옷을 거두고 옷장에서 가을 옷을 꺼내어 걸고 있다. 옷들을 정리하다보니 유행이 훨씬 지난 옷들이 꽤나 많다. ‘너희들도 햇빛 볼 날이 있구나.’ 하면서 씨익 웃음이 난다.
옷은 시대상을 그려낸다. 옛날 이야기이지만 카터 대통령이 이란 대사관 직원들이 일 년간 포로로 잡혀 있자 구출작전을 폈다가 실패했다. 그러자 실망한 시민들은 말 타고 총 쏘고 인디언들을 쫓아내는 옛날 서부 개척시대를 그리워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청바지, 굵은 혁대에 커다란 버클, 후린지가 달린 웨스턴 셔츠, 그리고 부츠 장화, 이렇게 입고 컨트리 송을 부르며 다녔다.
월남전? 젊은 세대들이 제도 사회의 질서가 싫어졌다. 그들은 징병을 피하고 머리는 장발, 옷은 찢어진 바지의 히피족이 되었고 그리고 노숙자가 반체제의 상징이었다.
이제 코로나 팬데믹으로 세상 사람들의 생각을 대표하는 옷의 흐름이 어떨까? 그런지 룩(Grunge Look)이란 단어가 생각난다. 더럽고 헤어지고 사이즈도 안 맞는 옷을 입은 모습이다. 지금 물질 만능 엘리트주의에서 낙후된 대다수의 사람들이 염세적 그리고 좌절을 맛보고 있다. 그러한 그들이 항의의 표시로 입으려고 하는 옷이 grunge 모습의 옷이라 생각이 든다. 발 빠르고 가장 유행에 민감하고 유행을 리드하는 루이비통에서 헤어지고 낡은 모습의 스니커 신발을 발표했다. 다 헤어진 신발 모습의 스니커를 몇 백 불에 팔 모양이다. 아마도 grunge look이 유행을 할 조짐이다. 나야 언감생심 그런 유행 옷을 살 돈도 마음도 또 나이도 아니지만 이제 내가 구석에 쳐박아둔 구닥다리 옷들을 거리낌 없이 입어도 좋을 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거지 옷이랄까, 넝마 같은 옷의 유행이 바람직할까? 얼마 전 대법관 긴즈버그의 시신이 의사당에 안치되고 긴 줄의 조의 행렬을 보았다. 그런데 그들에게 긴즈버그 대법관이 어떤 법안 처리를 주도해서 이룩해 놓았는지 물으면 과연 얼마가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을까? 흑인생명도 중요하다고 항의하는 집단의 사람들 중 얼마의 사람들이 조지 플로이드 같은 희생자들의 사건 발생의 전말과 자초지종을 알고 있을까?
나는 그들의 조의 행렬과 항의데모의 행위가 그동안 쌓이고 쌓인 불만이기도 하겠지만 그 놈의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활동이 제한되고, 실직으로 국가에서 주는 돈에나 의지하는 이렇게 앞뒤로 꽉 막힌 좌절의 폭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옷의 유행의 시도도 그러한 시민들의 마음의 표현의 시작이라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미래의 밝은 미국을 위해서 이래서는 안 된다. 좌절과 분노에서 도전과 승리의 마음으로 바꾸어야 한다.
Grunge look, 거지 옷에서 도전과 승리의 옷, 다시 말해서 서부 개척 시대의 옷으로 유행이 바꾸어져야 한다. 청바지, 굵은 혁대와 커다란 버클, 웨스턴 셔츠, 카우보이 챙이 큰 모자 긴 가죽 부츠, 이렇게 내가 옷을 입고 거리에 나서면 날 미친놈으로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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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묵 / 맥클린,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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