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고 있는 이 샌프란시스코는 미주 한인 역사와 괘를 같이하고 있는 유서 깊은 지역이다. 1903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설립한 ‘한인 친목회’를 비롯해 여러 독립 단체가 설립돼 조국의 독립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던 역사 깊은 곳이다. 필자의 청소년기와 초반 사회생활을 영위했던 제2의 고향이기도 하다.
우리 가족이 처음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던 것은 70년대 중반으로 작지만 알찬 한인사회가 존재해 있었다. 유일했던 한인식당으로는 재팬타운에 위치한 고려정이 있었으며 산호세 산장 식당과 함께 70년대 초창기의 북가주 한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바다낚시를 떠나 직접 잡아 온 회를 손님에게 주시던 김현해 사장님의 고려정 상호가 없어진 후 샌프란시스코의 한인 역사의 한 획이 없어진 것 같아 모두 아쉬워했다. 올해는 산장의 우택균 사장님이 세상을 등졌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기도 하였다.
70년도 샌프란시스코 한인사회는 한인회의 주도로 성장하는 느낌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용백, 인진식, 김근태 회장님들을 비롯해 이재구, 이돈응, 오인환 회장님 등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필자가 한인사회에 처음 발을 디딘 시기는 1990년이었다. 당시 박병호 한인회장님을 중심으로 차세대 팀을 조직해서 봉사활동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21대 이정순 회장님 산하에서는 부회장직을 맡게 되었다.
이정순 회장님은 도전적인 한국 아줌마의 기질을 살려 승승장구하여 평통 지역 회장을 거쳐 미주 총연의 최초 여성 회장으로 선출됨으로써 타성에 젖은 한인사회 문화를 새롭게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주기도 하였다. 필자는 이정순 회장님과 함께 평통에서 부회장직을 맡았다.
당시 수필가로 이름을 떨쳤던 고 이재상 님도 기억에 남는 인물이다. 신문에 30여년간 고정칼럼을 쓰면서 1995년에는 제7, 8기 민주평통 협의회장을 맡았었다. 필자 역시 이재상 회장님 산하에서 북가주 평통의 산 역사이신 이제남 간사님의 도움으로 민주평통의 부회장직으로 봉사하였었다. 90년도 중반에는 당시 샌프란시스코에서는 가장 큰 한글학교 교장을 수십년째 역임한 이경이 교장님의 요청으로 부이사장직을 맡아 변진섭 초청 기금모금 행사를 주도한 기억도 좋은 추억으로 남는다.
이쯤에는 이미 눈치챈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필자의 한인사회 봉사의 경험은 부회장, 부이사장직 등 주로 ‘부’자에 해당하는 직분이 대부분이었다. 차세대 리더로 낙인되어 오랫동안 봉사활동을 해오긴 헀지만 그렇다고 1.5세대가 1세 중심의 한인사회를 이끌기에는 어딘가 미덥지 않은 구석이 있었나 보다.
필자는 20년 전 지역구를 샌프란시스코에서 산호세로 변경했다. 혹시 회장 자리를 꿰차기가 조금 더 수월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직까지 그런 오퍼는 받아보지 못했다. 역시 이 산호세 지역도 만만치 않은 한인사회임이 틀림없다.
샌프란시스코에 살면서 몇 가지 흥미로운 사건들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하와이 첫 이민자들의 후손들이 합심하여 조직된 ‘상항 한인 봉사회’라는 단체가 그 첫번째다. 필자는 이 단체에서 잠시 인턴으로 근무한 적이 있는데 북가주에서 1921년 출생한 도라 김 여사와 그녀의 아들 탐 김, 프랭크 윤, 그리고 지금은 판사직에 오른 탐 서 등 한인사회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한인 이민 3세들의 주도로 한인커뮤니티를 위한 봉사에 나섰었다. 한인이 제일 많이 산다는 LA에서도 미주 이민 3세들로 구성된 봉사단체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는데 이 단체는 1976년부터 조직되었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로웠고 한인 이민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으로 기록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애석하게도 이 단체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거의 같은 시점에서 홍순경 이사장님과 신연자 원장님의 주도로 탄생한 한인센터(구 한인 인력개발원)는 사람은 바뀌었어도 단체는 아직도 굳건히 그 자리를 버티고 있음에 감사할 뿐이다.
또 한 가지는 샌프란시스코 중국 갱단 두목을 살해한 혐의로 10년간 옥고를 치르던 이철수씨가 새크라멘토 유니온 신문의 이경원 기자와 유재건 변호사를 중심으로 커뮤니티의 끈질긴 구명운동 덕분에 가석방으로 풀려났고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한인사회가 처음으로 사회적 정의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특히 한국인도 아닌 일본계 학생이었던 야마다 란코양이 구명 모금 활동에 주도적으로 봉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녀도 결국 변호사가 되었고 당시 대학생이었던 나에게도 이 사건은 큰 감동으로 다가와 결국에 법과대학에 가는 계기가 되었다.
낯선 외지에서 외로움과 고독의 싸움 속에서 정서적 욕구를 채워 받지 못하는 우리 북가주 이민자들에게 한국의 문화와 글자로 힘든 이민 생활 속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왔던 한국일보는 1975년 8월에 “금문교”라는 정규 컬럼을 신문에 첫 게재했다.
필진으로서는 신예선 작가, 김동옥 전 라디오 서울 대표, 차원태 연합감리교회 목사님으로 구성되어 90년때까지 북가주 한인들의 다양한 생각과 소리를 전달하였다.
그런 금문교가 첫 글을 낸 지 45년이 지난 올해 1월, 다시 새롭게 탄생하여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선사하고 있다. 필자도 이번 신규 필진에 포함된 것을 영광으로 여기며 이 칼럼을 10개월째 쓰고 있다. 앞서 언급된 첫 필진들은 이 지역 한인 올드타이머의 대명사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분들이다. 이분들은 북가주 한인타운 역사와 그 궤를 함께 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동옥 사장님은 북가주의 언론사로 시작해 지금은 본국에서 성공적인 개발 사업을 하고 계시다. 차원태 목사님은 초창기 지역의 원로 목사님으로서 이민자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오신 훌륭한 분이었다. 그리고 한번도 수필을 써본 적이 없는 나에게 무조건적인 신뢰와 믿음으로 글을 써보라는 반강제적 명령을 내린 나의 정신적 멘토 신예선 선생님도 이번 기회에 감사를 표시한다. 뭐든지 첫 삽을 뜨기가 힘들어 그렇지 한번 하면 또 계속할 수 있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해주신 고마운 분이다.
필자의 금문교 칼럼도 거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 하지만 금문교 칼럼과 한국일보 애독자들과의 인연은 계속될 것이다. 사람은 물론, 꽃이든 나무이든 모든 것들은 인연으로 맺어진다. 그 친밀감, 신비감 및 연대감에 정겨움을 느낀다. 물리적인 이별 후에도 지속되는 사람과 사람의 인연은 아름답고 소중하다. 특히나 우리 이민자들은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지금은 이렇게 북가주 한 동네에 모여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 이민자들은 좋든 싫든 이 인연에 서로 기대어 살 수밖에 없다. 우리는 홀로 존재할 수 없기에 서로 만나는 인연은 귀한 것이다. 이 인연을 북가주 한인들과 함께 소중하게 가꾸어 나가고 싶다. 그 맺어짐의 깊이로 인해 인연은 곧 사랑임을, 삶임을 우리는 알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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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에스라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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