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서울 광화문광장 이순신동상 앞에서 비건세상을위한시민모임 회원들이 육식 중단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
마트에 가면 가끔 정육점 쇼 케이스 안을 들여다본다. 처음 드는 생각은 “방금 잘린 신선한 고기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 그 사이로 훅 치고 들어오는 두 번째 생각은 영국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의 말이다.“인간은 다 정육점의 고기 신세야. 고통 받는 인간도 모두 고기야.”
고기는 정말 미스터리한 식재료다. 세속적이지만 절대적이고, 종교적인 듯 보이나 성스럽진 않으니까. 중요한 날마다 고기가 한 역할 하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먹는 것을 밝히지 않는 사람도, 육회가 있다는 걸 모르는 구식 인간도 고기 먹는 자리에선 젓가락을 든다. 기회 있을 때마다 배를 채워야 한다는 자취생의 강박처럼 고기를 몸 안에 비축한다. 열광적이고 질서정연한 혼잡함 속에서 느릿하게 시작하다가 곧바로 고기의 플롯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마치 고기가 존재론적 위기로부터 구해주기라도 할 것처럼, 그렇게 평화와 안락함과 에너지를 줄 것처럼, 다 먹고 나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것처럼.
지혜로운 사람들은 각자 무엇을 먹는지 알아야 한다고 충고하지만 우리는 고기가 동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자주 잊는다. 고기는 단지 식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긴 누가 불닭 치킨을 뜯으면서 이 닭이 행복하게 살았는지, 알을 낳다가 너무 지쳐서 실의에 빠지지 않았는지 고민한단 말인가.
정말이지 육류만큼 문화적인 불안을 부르는 식재료가 없다. 안심 한 덩이를 에워싼 논의는 환경 비용에서 시작해 정신적 죄책감과 신체적 건강 문제까지 포괄한다. 심장마비의 원인이며 광우병의 숙주라는 논쟁부터, 호르몬 조작과 항생제, 동물 복지 산업의 그림자에 이르기까지 불안의 이력은 차라리 스펙터클하다.
그래서 다들 가축이 이상적인 환경에서 길러졌는지, 스트레스를 줄인 환경에서 최대한 차분하게 도축되었는지(말이 조금 이상하지만) 노심초사하다가 원산지를 알기 전까지는 고기를 입에 대지 않는 소심한 육식 동물이 되었다.
나는 채소를 정말 좋아한다. 가끔 내가 사람 꼴을 한 염소 같을 때도 있다. 나는 쓴 맛이 나는 채소도 드레싱 없이 너무 잘 먹기 때문에 루꼴라를 특히 좋아해서 루꼴라로 베개 속을 하면 잘 때마다 코에 루꼴라 향이 가득 퍼지겠지, 하고 순박하게 공상한다. 물론 이 이야기는 육류 산업 시스템이 만든 젊은 채식주의자(도시 청년이 자기가 먹는 음식의 근원에 대해 숙고하는 과정으로서)의 경우와는 엄밀히 다르다.
무엇을 먹을지 식별하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다. 완전히 금욕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일관된 식습관을 유지할 수도 없다. 밀가루를 적대시하고 유제품을 먹지 않는 부분 채식주의자도, 직접 곡물을 갈아 먹는 골수 채식주의자도, 유기농 제품만이 진짜 건강식이라는 건강 염려증 환자도 혼란스럽긴 마찬가지다.
이 와중에 마블링이 있는 지방질의 궁둥이는 시대를 정의하는 한 점이 되었다. 고기가 귀했던 세대의 어른들도, 크게 아쉽지 않은 요즘 아이들도 피의 맛을 열망한다.
동네 정육점을 대체하기 직전인 육축 인터넷몰과, 고기 생산 과정을 참신하게 제어하는 젊은 판매업자들과, 근육과 근육 사이를 해체하다시피 이름 붙인 냉혹한 축산업자와, 고기 부위별 종교를 창시한 레스토랑이 넘실대는 세태라면 메뉴에 고기가 들어 있는 한 누구라도 그릇을 다 비울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을 것이다.
스테이크가 테이블에 놓이면 양복 입은 신사는 깊은 눈초리로 진갈색 덩어리를 응시한다. 의식적이진 않으나 필시 소유한 자의 표정이다. 그것은 “내 고기에 손대지 마”라는 경고. 그가 손바닥으로 따뜻한 접시 가장자리를 감싸는 모습은 필시 말이 시작되기 이전 시대로부터 이어진 몸의 언어일 것이다.
스테이크는 그렇게 감정이 없는 부자 사업가가 아니라, 문화적 남성 호르몬을 강화하려는 식도락가들의 종파가 되었다. 뭔가 되게 근본적이다. 대출 이자 이전의, 긴축 재정 이전의, 역사 이전의 무엇인가에 대한 은유랄까.
다들 긴장하며 중산층 사다리를 부둥켜안은 지금, 핏방울 듣는 도톰한 안심이야말로 자신감이라는 작은 투표권을 준다. 칼질 하며 먹는 스테이크만한 자부심이 또 무엇인가. 승리자를 위한 본래의 보상. 자유 시장의 맛. 모던 중산층의 노래. 들소를 사냥하던 직립 보행 조상들과의 직접 연결.
예전에 제임스 본드가 단골일 것 같은 서양의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천장에 매달린 고깃덩어리와, 가슴에서 발목 길이의 앞치마를 입은 주방 스태프와, 상기된 얼굴로 서빙하는 직원과, 스테이크 접시 옆에 놓인 도살 기구(커다란 나이프와 더 큰 포크)를 볼 때마다 꼭 레고 속에 들어간 것 같았다.
거기에 관자놀이가 희끗하고 턱이 반듯한 손님과, 커플을 위한 초호화 세팅과, 드라이 에이징이며 와규와 앵거스의 이종 교배에 대해 세세한 지식을 자랑하는 남자를 보면 스테이크는 확실히 요리라기보다 엔지니어링과 비슷해 보였다. 프라임 컷 살덩어리가 그랑 크뤼 와인과 함께 테이블로 향하는 퍼레이드에 가격이 매겨지면 그 지출은 필레 미뇽의 비밀 재료가 될 것이다.
스테이크는 너무 고상한 메뉴는 아닐지 몰라도 최소한 현대적이다. 동시에 셰프가 필요하지 않은 메뉴이기도 하다. 보면 다들 나름대로 고기 굽기의 고수라서 그 잘난 억양으로 중불로 해라, 육즙 다 빠진다, 그만 뒤집어라, 턱으로 지시하는 셰프는 원하지 않는다.
그냥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고 방금 구워준 고기를 맛있게 먹어주는 친구만 환영할 뿐. 나처럼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괜찮은 사람도 음식평론가가 석쇠 옆에 딱 붙어서 이렇다 저렇다 말이 많으면 당장 쫓아낼 것이다.
나도 최상급 등심과 올리브 오일로 구운 감자, 그린 샐러드를 만들어 집에 놀러 온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고 싶다. 돈도 엄청 들이지 않으면서 엄마에게 행복을 주고 싶다. 그런데 그건 언제나 말도 안되는 말이었다. 고기를 조금 사서 스테이크를 구울 때마다 내가 얼마나 이기적으로 살았는지 실감한다.
나서서 구워본 적 없는 나로선 기름을 얼마나 넣을지, 언제 소금을 뿌릴지, 어느 정도로 익힐지 주춤거리다 보면 입에선 “망했다” 소리가 절로 나온다. 덜그럭거리는 후드 소음 속에서 연기가 사라지고 나면 아름답게 반짝이는 스테이크가 아니라 비스킷처럼 타버린 고기만 남았으니까. 그 다음이 바로 엄마가 기름이 범벅 된 주방을 뒤치다꺼리 해주는 순간인 것이다.
사람들이 매일 그렇게 고기를 먹어서 일인당 고기 섭취량이 이삼십 년 전에 비해 육칠 배 늘었다지만 그래 봤자 미국의 사분의 일이라는 게 사실 좀 어리둥절하다. 뭐, 여기가 인구 세 사람당 소 한 마리 비율이라는 미국은 아니니까.
아무튼 붉은 고기의 봄이 왔는지는 모르지만, 이제 고기를 사는 것은 담배를 사는 것과 같은 개념이 되었다. 죄책감을 주는 기쁨.
혁신적인 스팸 조리법을 개발하든, 복잡한 내장 요리를 단순하게 내놓든, 대서양까지 안 건너가고 배달 한 번으로 뉴욕 스테이크를 먹든, 고기를 먹는 행위에는 반드시 윤리 문제가 뒤따르기 때문에.
어떤 때는 삼겹살이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을지 궁금해진다. 비둘기나 토끼가 미래의 고기라는 주장 역시 동물을 죽인다는 점에선 거기서 거기다. 해장국 속에서 불쑥 솟은 보랏빛 선지는 어쩐지 도덕적으로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육식 같지만 그 전에 소는 이미 도살되었다.
사람들은 소를 먹고 소는 그 나머지를 먹는다. 전세계 얼지 않은 토지 표면의 30%가 가축 생산용이며 그 대부분은 방목 소를 위한 땅. 지평선을 채우는 옥수수와 열대 우림, 광활한 들판과 팜파스 초원 지대를 뺀 나머지만이 다른 종들의 서식지이다.
지나친 방목이 사막화의 원인이라는 과학자들과, 땅을 보호하려면 동물들의 접근을 완전히 차단해야 한다는 환경주의자들의 주장이 메아리 치는 이 순간에도 소는 거대 단위로 물을 오염시키고 부글거리는 메탄 가스로 지구 온난화에 한몫 한다.
그렇다면 승리의 맛이 나는 소고기가 지글거리며 익는 소리에는 필시 두려움의 냄새가 섞여 있을 것이다.
곡물도 없고, 곡물 먹고 자란 가축도 없던 농경 시대에 비추어 봐도 우리의 메뉴 선택은 딱히 문명화되었다거나 이성적이지 않다. 어쩌면 제한적인 섭생에 뿌리를 둔 부처의 식단이 가장 옳은 것도 같다.
표면적으로 합리적이고, 미약하게 합법적이니까. 요즘 새 조류로 떠오른 간헐적 단식에도 불교의 핵심이 있다. 가공 식품을 피하고, 천천히 식사하고, 끼니 때를 잘 맞추어라. 그야말로 사발에 담긴 채식주의의 메들리이다. 이때 꼭 껴안고 싶게 후덕한 불상의 체형은 역설적인 위트를 풍긴다.
아무리 생명을 존중하는 척 착한 시늉을 해도 도살장이 없는 부탄에서 살 수도 없는 지금, 한 마디 말로 육식의 변명을 삼고자 한다. 고기는 더 나은 내일의 근육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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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눈에 힘이 없고 신경질적인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