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지 않는 건조한 날씨가 지속되는 가운데 하늘 빛은 산불로 인한 먼지 등 공기 오염으로 뿌옇게 흐려진 여름의 길목에서 시원하게 내리던 빗줄기가 유독 그립다. 지난 봄 코로나 팬데믹으로 온 세계가 멈춘 듯 보였던 어느 날, 밤 사이 지나간 빗줄기 이후 맞이했던 어느 상쾌했던 아침을 기억한다. 맑은 공기가 폐 속 깊이 정성스레 드리웠다가 말없이 온몸으로 퍼지던 아침.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고 걷던 길에 반짝이던 빗방울이 반자락쯤 영롱하게 걸려있던 거미줄이 보였다. 나무 계단의 경사진 사이를 메우기라도 하듯 정교하고도 아름답게 짜여진 방사형 거미줄엔 빗방울들이 걸려 금방이라도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곳에는 주인은 보이지 않고 빗방울만이 붙들려 있었다. 마치 우리의 공간이 거미줄 사이 사이 만들어진 개별적인 공간에 붙들려 있는 것처럼. 자유로운 바람은 그 거미줄 사이를 통과하며 이제 막 움트는 햇살을 나르고 있었다. 그 날의 거미줄은 ‘붙들린 물방울’로 또는 ‘붙들린 시공간’ 이라고 새겨져 있는 것 같았다. 샬롯의 거미줄에서와 같이 나 또한 그 거미줄에 이름을 붙이고 있었다.
‘샬롯의 거미줄(Charlotte’s Web)’은 1952년 미국 작가 엘윈 브룩스 화이트가 동물을 주인공으로 쓴 책으로 발간 이듬해 뉴베리 아너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전 세계적으로 많은 아이들이 읽고 아이들 추천도서에도 빠지지 않고 많은 사랑을 받는 책이다. 그것은 샬롯이 친구인 윌버에 대한 변함없는 우정과 믿음, 헌신이 울림으로 다가오며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그 가치를 깨달아 갈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2007년에는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지며 더욱 유명해졌으며 영화배우인 줄리아 로버츠가 샬롯역의 목소리를 맡아 연기했다. 주인공인 윌버와 함께 등장하는 샬롯은 동물 우리의 문간 위에 사는 거미였다. 책에서 죽음의 위기에 처한 친구 윌버를 구하기 위해 묘책을 강구하던 샬롯은 자신만의 무기인 거미줄에 글자를 새기는 일을 밤새 수행하며 평범한 자신의 친구를 멋지고 근사하며 겸허하기까지 한 친구로 이름 붙여 주었다. 예를 들어 친구인 윌버가 머무는 자리 위에 거미줄을 치고 그곳에 ‘근사한’ 이라고 글자를 새겨 놓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를 보며 거미가 글씨를 쓰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여기며 불가사의하게 이루어진 이 일은 결국 이름 붙여진 대로 근사하고 겸허하기까지 한 윌버로 불리게 된다. 그리고 품평회에서 상을 받은 돼지 윌버는 크리스마스에 요리가 되는 대신 이듬해 봄을 다시 만날 수 있는 생명을 삶을 얻게 된다.
우리는 매 순간 이미 이름지어진 무언가를 사용하며 찾고 누리며 더불어 살아간다. 세상의 모든 언어로 된 이름표를 갖는 사물들과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에 이르기까지. 무언가에게 이름표를 붙이며, 그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름이란 때론 실체를 가리키는 명사이기도 하지만 때론 실체를 표현하는 형용사이기도 하다. 그것이 그 이름을 가질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떠나 한번 붙여져 명명되면 마법과도 같이 그 이름은 불리워지는 사물과 동일시 된다. 그리고 그렇게 불리워질 때마다 살아있는 생명체에게는 더욱 그 이름에 걸맞게 변화되고자 하는 노력이 일어난다. 그 이름이 그의 의지와 부합될수록 그 변화는 실로 놀랍게 달라질 수 있다. 샬롯은 자신을 헌신하며 거미줄에 글자를 새겨 넣었고 아무도 자신의 공을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가치 있는 일을 했으며 그 결과 한 친구의 생명을 구하게 된다.
온라인 세상에서 쏟아지는 여러 정보들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마다 제각각 붙여 놓은 이름표들이 수없이 존재한다. 실체를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 가십거리로 누군가를 공격하는 이름표는 그 사람들을 더욱 외롭고 고통스러운 상황으로 몰아 넣어 예상치 못한 비극을 야기시키기도 하며, 정확하지 않은 정보에 또 다른 이름표를 달아 현실을 부정하고 왜곡하여 더 큰 파장을 초래하기도 한다. 수 많은 조작된 또는 편파적인 사실들 또한 하나의 이름표로 존재하며 개인의 가치관의 차이라 여겼던 왜곡된 발언이 미디어 속에서 타인과 사회에 영향을 미치며 일파만파 확산되기도 한다. 그것들은 또한 현재와 같은 코로나19 상황에서 개인들의 삶과 안전에 위협이 되어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바꾸게 함으로써 힘겨움과 울분을 자아내게 하기도 한다.
지금이야말로 지혜로운 샬롯의 거미줄이 필요한 시기인지 모른다. 누군가는 세상 속에 지혜로운 이름표를 달고 선한 영향력을 발휘해 주길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아니 우리 모두가 각자 샬롯이 되어 서로를 살리는 글을 새기며 그곳에 이름표를 달아줄 필요가 있을 것이다.
‘붙들린 시공간’이라 이름했던 거미줄을 만난 지도 여러 달이 지났다. 그러나 지금 나는 온전히 역설적인 다른 이름표를 그에게 달아주고 싶다. 그의 이름은 ‘자유의 문’. 아직 물방울 밖에 걸리지 않았던 그 거미줄은 분명 좁지만 그물 간의 거리를 잘 지켜 바람처럼 통과하기만 한다면 문제 발생을 줄일 수 있는 자유로울 수 있는 좁은 문이다. 물론 그 좁은 문을 무사히 통과 하기 위해선 자신의 부피를 최대한 줄여야만 하는 수고로움을 감내해야만 할 것이다. 반면 그곳엔 그보다 훨씬 더 큰 문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거미줄 밖에 나 있는 문이다. 왜 들어가면 걸릴 줄 뻔히 아는 거미줄 안의 공간 속에 자신을 던져 넣으며 붙들려 그 공간 속에서 자유를 달라 외치는가? 진정한 자유는 우리가 사회적 규율이나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한 규약을 무시하고 지키지 않은 데서 오는 개별적 자유가 아닌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며 지켜 나갈 때 모두에게 주어지는 공동적 배려 속에 존재하는 자유일 것이다. 세상 어딘가에서 샬롯이 되어 새로이 거미줄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글을 새기는 이들을 만나고 싶다. 보다 많은 샬롯의 거미줄을, 샬롯의 이름표를 발견하고 싶다
<김소형 (SF한문협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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