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 그대로 직역하면 미친 연극이란 뜻이지만 정신심리 분야에서는 심리치료의 한 유형인 심리극으로 부르고 있다. 20세기 초 정신과의사 모레노가 정신과 환자로 하여금 내면의 심리적 문제들을 쉽게 표출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의 하나로 심리극을 시작했다.
심리극의 등장인물들은 미리 정한 줄거리 없이 연극을 진행한다. 일종의 즉흥극이다. 무대란 가상세계에서 자신의 정서적, 심리적 문제점을 부끄러움이나 죄의식 없이 자유롭게, 지금 여기의 현실세계로 끌어와 말과 행동의 연기를 통해 고통을 정화시켜 주는 것이다.
이렇게 부담 없이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한다는 점에서 정신분석적 경향이 있지만 관객이 주로 비슷한 환자들이라 집단 심리치료의 효과도 겸할 수 있다. 또한 연기라는 행동으로 보여주므로 행동치료도 된다.
진단과 치료를 빨리 빨리 해야 하는 디지털 시대인 지금은 주로 입원환자만을 대상으로 심리극 치료를 하고 있다. 내가 1970년대 정신과 수련의 과정을 받고 있을 당시에는 외래에서도 흔히 사용되었다. 그때 어떤 정신과 의사가 들려주었던 환자 이야기다.
환자는 60줄에 들어서는 노신사였다. 중소기업 간부로 일하다가 회사가 문을 닫는 바람에 일찍 은퇴했다. 벌어놓은 돈도 좀 있고 아내가 아직 직장을 가지고 있었기에 막중한 책임감과 힘든 직장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 싶어 회사를 떠났다.
그런데 은퇴 후 몇 달이 지난 뒤부터 매일 기분이 우울하고 짜증이 났다. 아내가 하던 가사 일을 대신 해야 하는 등 바꾸어진 자신의 역할에도 잘 적응하지 못했다. 든든한 남편, 자랑스러운 아버지로부터 거추장스런 인간이 된 듯 상실감과 정체성 혼란에 빠졌다.
점점 밥맛도 떨어지고, 잠들기 힘들고, 항상 피곤하고, 소화도 잘 안되고, 친구를 만나거나 친척파티에 참석하기 싫고 그저 모든 게 귀찮아 매사에 무력감을 느꼈다. 이렇게 살아서 뭐하겠느냐는 생각이 드는 등 심한 우울병에 빠지고 말았다.
‘Role(역할)’은 본래 연극에서 사용된 용어다.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자신에게 맡겨진, 또는 자신에게 기대되는 역할이 있다. 남성의 경우, 자식, 남편, 아버지란 선천적 역할, 그리고 살면서 노력하여 얻은 사회적 지위-법조인, 의료인, 성직자, 교육자, 정치인 등 - 인 후천적 역할이 그것이다.
50대에 은퇴한 남자들의 경우 이런 역할의 혼란성이 우울증의 큰 위험요소가 될 수 있다. 정신질환 진단목록에 은퇴우울증은 없다. 그러나 임상에서는 흔히 은퇴증후군을 가진 남자를 만난다. 증상이 너무 심하면 주요우울증으로 갈 수 있다.
앞의 환자는 치료에 아주 부정적이었다. 우울증 약 복용과 심리치료를 거부하고 병실에 홀로 남아 철학 책만 열심히 읽었다. 그렇다고 퇴원도 시킬 수 없었다. 의사의 조언에 반대하여 퇴원 동의서에 서명을 안했기 때문이었다. 정신과에서 환자 상태가 좋아지지도 않았는데 강제로 퇴원시킨 뒤 무슨 문제가 생기면 법적 책임에 부딪치게 된다.
의사는 우연히 환자가 연극에 취미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환자에게 사이코드라마의 주인공 역을 한번만 해보라고 사정사정 한 끝에 겨우 승낙을 받았다. 처음에 어색해했던 그는 점점 자신을 주인공과 동일화시켜 드라마의 역을 아주 진지하게 잘 해냈다. 일반적으로 사이코드라마에 참가한 환자들은 극 속에 몰입하여 정말 열심히 배역을 소화하곤 한다.
인간의 생활주기 가운데 생후 4세-6세 사이의 초기아동기 때는 지능과 언어능력의 급속한 발달을 이룬다. 그 결과 아이들은 상상과 환상을 부추길 수 있는 놀이나 게임에 재미를 붙인다. 또한 놀이를 통해 자신의 부모나 가족상황을 나타내어 갈등을 해소하고 잠재된 욕구를 표출할 수도 있다. 내 임상경험에 의하면 이 시기에 특히 놀이를 좋아했던 사람들이 심리연극 연기를 잘했다.
앞의 환자는 또 한번의 사이코드라마를 마친 뒤 증상이 빨리 회복되어 퇴원할 수 있었다. 항우울제나 어느 심리치료보다 사이코드라마(Psychodrama)가 제일 효과가 있던 케이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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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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