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의 신문에는 세 사람의 죽음에 관련한 기사가 며칠의 시간 간격으로 실렸다. 두 사람은 자살로 죽음을 택했고 한 사람은 자연사로 생을 마감했다. 최 숙현 이라는 23살의 경주시청 철인 3종 경기 선수가 자살했다. 팀 닥터라 불리는 의사도 아닌 물리 치료 담당자와 감독, 동료 선수들로부터 신체적, 정신적 폭행을 당했다. 뿐만 아니라 최 선수나 최 선수의 아버지가 경주시청과 경주체육회에 신고를 했지만 아무런 제재 조치나 해결 시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린 최숙현 선수가 당한 언어폭력이나 체벌, 성추행 등에 대한 기사를 읽으면서 나도 절망스러웠다. 팀 닥터라는 안모씨는 덩치도 큰편이라고 했다. 큰 덩치와 팀내에서의 권력을 이용하여 어린 여자선수를 때리고, 겁박하고, 금품을 요구하고 성희롱을 하면 어떻게 선수가 최고의 성적을 낼 수 있겠는가. 최숙현 선수는 분명 처음에는 모든 것을 자신의 부족함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성적이 오르지 않아도 체벌을 당해도 자신이 잘못해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더 악화되는 환경은 최 선수로 하여금 외부에 도움을 요청하게 했다. 도움을 요청한 곳에서도 외면 당했을 때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판단했다. 최 선수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다. 최 선수의 죽음은 기관들이 조사를 시작하게 했고, 국회도 청문회를 열게 되었다. 관련자들은 한 두사람씩 혐의를 인정했고, 가해자로 지목됐던 팀 동료들도 사과하길 원했다. 같은 소속팀의 여러명의 선수들도 폭행을 인정하고 증언 했다. 아마도 최 선수의 죽음은 그 정도가 어느정도 일지는 모르지만 분명 체육계의 지도자나 지도 방법에 변화를 줄 것이다. 최 선수의 죽음의 방법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 슬프고 안타까운 최 선수의 죽음이 체육계 뿐아니라 이 세상 어두운곳에 한알의 밀알이 되길 바란다.
또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박원순 서울시장의 죽음이다.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직접적인 이유는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함께 근무하던 여비서의 성추행 고소건이 아닌가 짐작한다. 고인은 현직 서울시장이었다. 서울시장이라는 직책이 어느 날 출근을 하지않고 산에 가서 죽어버려도 되는 그런 것인가. 만약 성희롱 고소건이 그를 자살로 이르게 했다면 그의 의도는 무엇인가? 피해자에게 죽음으로 사죄한 것인가, 할말은 많지만 구질구질하게 변명하지 않겠다는 뜻인가. 아니면 이제 줄줄이 이어질 또 다른 고소인들의 등장을 단칼에 막아버림으로 더이상 ‘쪽팔리고 싶지 않아서’일까. 그의 죽음을 바라보는 어떤이들은 그가 ‘맑은사람’이라서 그런 죽음을 택했다고 한다. 그가 골방에서 한 짓이 정말 맑은 사람이 하는 짓일까? 우리 편은 그런 짓을 해도 ‘맑은 사람’이라는 것인가. 나는 그가 얼마나 아름다운 일들을 많이 했는지 모른다. 박시장의 죽음이 역설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가 인권변호사로 이름을 얻게 된 것은 1993년의 서울대 신모 교수의 우모 조교에게 행한 성희롱 사건을 맡게 된 것이었다. 이 사건은 한국에서 성희롱 사건으로 피해자가 승소를 이룬 첫 번째 소송이었다. 30여년이 흐르고 그가 성희롱 고소건의 가해자로 소송을 당했고 그는 자살했다. 그의 자살로 성추행 고소사건은 ‘공소권 없음’으로 수사 종결 된다고 한다. 참 편리하다. 박시장의 죽음을 바라보는 마음은 그래서 찝찝하다.
백선엽 장군이 10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20년생이니 한국 나이로는 101세를 사신 셈이다. 얼마전 그의 사후 매장지를 서울 현충원이 아닌 대전 현충원으로 할 것이라는 기사에 의아해 했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서울 현충원에 자리가 없어서라고 하지만 진짜 이유는 그가 친일파로 분류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백선엽 장군은 1943년 만주국 소위로 간도특설대에 복무했다. 그의 나이 23세때 였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백선엽장군의 2년여의 간도특설대 복무 기간동안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다는 이유로 그를 친일파로 분류 하였다. 백선엽 장군은 간도특설대와 사회주의계열 독립군이었던 동북한인연군의 싸움은 이미 1941년 동북항일연군의 패배로 끝나고 독립군들은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갔다고 주장했다. 본인이 근무했던 1943년부터 2년간은 중국의 팔로군과의 싸움만 있었기 때문에 독립군과 싸움을 하지 않았다 항변했지만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백장군이 독립군과 싸웠다는 증거도 없다. 백장군은 본인의 사후 매장지를 대전 현충원으로 할 수 있다는 보훈처의 의견을 수용했다 한다. 백장군은 독립후 제1호 4성장군 대장, 육군참모총장이 되었고 6.25 전쟁 및 빨치산 공비 토벌등에 많은 공을 세웠다.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는 조문 방명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미국을 대신해 백장군의 서거에 나의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그는 한국군 제1호 4성장군이었고, 지도자, 애국자, 전사였습니다. 그는 현대 한미동맹 조성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미국이 바라보는 백 장군과 일부 한국인이 바라보는 백장군에 대한 시각에 현저한 차이가 있다. 그는 자기 삶을 충실히 살았고 때가 되어 나라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삶에 대해서는 지금의 정쟁에서 보다는 오랜 후에 더 바른 평가가 내려질 것이다.
<황용식 (공인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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