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주나 쌀독에서 바가지가 밑바닥에 긁히는 소리가 나면 어머님은 머슴을 부른다. 그는 곳간에서 벼 한 가마를 꺼내어 지게에 올려놓고 우리가 나오길 기다린다. 어머님은 쌀을 담을 자루를 챙기고, 나는 겨를 담을 그릇을 찾는다. 집에서 두어 마장 가면 방앗간이 있다. 검지가 잘린 주인은 우리가 가면 괴물 같은 발동기의 코(배기 밸브)를 누르고 꺾쇠 손잡이를 돌려 시동을 건다. 발동기는 해수에 걸린 사람처럼 몇 번 헛기침하고 난 뒤에 갑자기 대포 쏘는 소리를 내면서 제 속력을 낸다. 내가 간 이유가 거기에 있다.
벼가 몇 차례 거쳐서 도정이 되는 동안 손바닥만 한 유리창을 통해서 쌀이 내려가면서 점점 하얗게 변하는 것을 보면 주위의 부산함도 잠시 잊는다. 머슴은 밖에 나가서 왕겨를 가마니에 퍼 담고, 어머니는 고운 겨를 자루에 담는다. 도정이 끝나면 주인은 쌀 두 되를 삯으로 가져간다. 그는 됫박을 툭툭 치면서 고봉으로 퍼 담는다. 주인과 어머님의 표정은 방앗간에 들어갈 때와는 사뭇 다르게 변하는 순간이다. 방앗간에 갈 때는 짐이 하나이었지만 돌아올 때는 짐이 셋으로 나누어진다. 쌀은 뒤주와 쌀독에, 왕겨는 헛간에, 고운 겨는 광으로 가면 먹지도 않아도 배가 부르다. 어머님은 푸념 비슷하게, “세상 참, 많이 좋아졌다.” “왜유?”
어머님이 18살에 시집왔을 때의 방아 이야기는 백 년도 넘는다. 먼동이 트면 장닭이 운다. 부스스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입고 밖으로 나온다. 짚신을 걸쳐 신고 광으로 가서 그날에 필요한 양의 벼를 광주리에 담아 절구통이 있는 헛간으로 간다. 절구를 들었을 때야 큰 시누이가 와서 다른 절구를 들고 박자를 맞춘다. 벼의 껍질이 다 벗겨지면 키에 담아 왕겨를 날리고 쌀만 담는다. 다시 절구통에 넣어 쌀이 하얗게 될 때까지 몇 번이고 키질하고 빻는다. 또한 가을에는 조나 수수도 절구통에서 새 모습을 드러낸다. 더구나 명절이나 제사가 있으면 아낙네는 아예 절구에서 산다. 간혹 인절미나 가래떡을 빻을 때는 너무 힘이 들어 남정네들이 거들기는 하지만 그 나머지의 모든 곡식은 절구통에서 태어난다. 동네 소문도 절구에서 새어 나온다.
절굿공이의 오르내리는 속도는 그날의 기분에 따라 다르다. 갓난아기가 자거나 집안 어른들이 기침하지 않았으면 되도록 조심스럽게 다룬다. 일이 밀리거나 바쁠 때는 공이의 속도는 자신도 모르게 빨라진다. 여인의 푸념과 한풀이도 절굿공이를 쥐는 방법에 따라 다르다. 푸념하는 아낙네의 손놀림은 건성으로 가볍지만, 한풀이나 분풀이를 하는 여인은 두 손으로 절구통 안을 내려다보면서 절구 안에 들어 있는 것이 깨어지라고 있는 힘을 다해 내리친다. 남편도 시어머니나 시누이도 절구통을 안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여름에 봉숭아의 꽃잎을 따서 절구에 넣어 빻을 때는 여인의 모습은 천사나 다름이 없다.
어머님이 나에게 세상 구경을 해 주셨을 때야 동네에 방앗간이란 게 생겼다. 우리 동네에 있던 방앗간도 그때 생겼는데 다행히 급우의 아버지가 주인이었다. 섣달그믐에는 시루에 찐 쌀을 가지고 가서 가래떡을 빼 온다. 말랑말랑하고 쫄깃쫄깃한 가래떡을 입에 문 나는 함지박을 똬리 위에 이고 가는 어머님의 뒤를 따른다. 나는 세상에 부러울 게 하나도 없다.
“재훈아 세상, 많이 변했다.”
“돈 때문에유?”
“아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두 가래떡을 빻으려면 머슴이나 동네 아저씨들이 와서 거들어야 했는디 이젠 돈 얼마만 주면 해결되니께. 참 좋다. 왠지 너무 쉬워 거저라는 생각이 든다.”
벼만 도정하는 게 아니고 방앗간은 보리의 옷을 벗기고, 밀을 밀가루로, 고추를 고춧가루로, 깨를 기름으로, 명절에는 떡을 만들어 주는 고마운 곳이다.
길을 가다가 방앗간의 간판을 보면 자석에 못이 끌리듯이 어머님이 생각난다. 가슴이 무거워 더는 가지 못하고 그 앞에 발을 멈춘다. 고향의 추억을 고스란히 담은 곳이라 생각하고 가만히 가게 안을 들여다본다. 그냥 간판만 보고 지나칠 걸 하는 마음을 가다듬고 걸음을 재촉한다. 다음에는 다른 방앗간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헛된 생각에 도리머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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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 워싱턴 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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