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노환으로 입원소식에 하루속히 쾌유하시어 100세 축하의 날을 기대했는데 급작스런 부음에 비통한 마음뿐입니다.
회고하면 6.25전쟁 발발 때 백 장군님 지휘의 제1사단(수색) 소속의 학도병 근무가 첫 인연이었습니다. 1952년 초 지리산 공비토벌 백야전 전투사령관으로 대구 육군첩보부대(HID)를 새벽에 잠시 비공식 방문하셨을 때 북한군의 전투서열 상황설명에 당황하시던 기억이 납니다. 이후 2010년 11월 4일 워싱턴에 소재한 미 국방대학원(DNU) 초청 특강 후 한미 향군 간담회 및 리셉션에서 각별히 향군 활동과 한미동맹 등에 격려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2016년-2018년 새에덴교회가 주최한 미국참전용사 초청행사 때, 미 8군사령관 환영식 그리고 한국전참전기념 추모의 벽 건립 모금관계로 전쟁기념관 사무실에서 도움 되는 좋은 말씀 주신 것이 마지막이 된 셈이고 주신 기념사진에 친필 사인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백 장군은 1920년 11월 22일 평안남도 강서군 덕흥리에서 2남1녀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차남은 백인엽 육군소장입니다. 39년 평양사범학교를 졸업, 잠시 교편생활 후 만주국의 봉천군관학교를 이수하고 8.15해방을 맞아 잠시 북한의 고향에서 지내다 조만식 선생의 권유로 남한으로 피난, 46년 군병반을 마치고 중위로 임관해 창군멤버로 47년 연대장을 역임했습니다.
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후의 여순, 순천사건의 진압수습에 잇따른 군 내부의 좌익 숙군사업 그리고 6.25전쟁 혼란지에 준동한 지리산 일대 공산 게릴라소탕의 백전투사령관을 역임했습니다. 특히 마지막 방어선인 다부동 전투의 지휘와 50년 9월2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북진의 평양 입성 주력부대인 1사단장의 전투 지휘관으로 활약함으로써 그 명성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1사단장을 거쳐 육군본부 정보국장 첫 육군참모총장을 지내고 휴전 후 세계 최대급의 제1야전군사령관 및 첫 4성 장군에 육군참모총장을 재임하고 정전협정 조인 한국군 대표와 합참의장을 마지막으로 14년간의 군 경력으로 퇴역했습니다. 특히 4성 장군의 7년 경력은 특이한 경력이며 이는 신생국가의 전쟁을 겪은 특수한 상황이었습니다.
만 40세에 퇴역 후 20년간은 외교관으로 대만, 불란서, 캐나다 대사로 지낸 후 교통부장관 및 국영기업체(한국종합화학회사) 사장을 역임했습니다. 60세에 12.12 사태이후는 공적생활에 거리를 두는 한편 6.25 전쟁 전사를 남기는 사명감으로 ‘군과 나’ ‘전쟁과 평화(일어판)’ ‘실록지리산’ ‘민족의 증언’ ‘부산에서 판문점’ 등 전사집 발간과 일간지에 연재를 했습니다.
노후에도 국방의 중요성을 알리는 강연등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습니다.
100세 되신 백 장군은 6.25 전쟁발발에서 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미국과 유엔 참전국가들에서 ‘살아있는 전설(Living legend)’로 불리는 인물입니다. 나라존망이 위급한 다부동 방어전투상황을 살펴보면 50년 8월3일-30일간의 전투에서 8,000명에 불과한 1사단 병력으로 총공세를 펼친 북한군 2만여명 중 1만2천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는데 국군 2천16명, 미군 1,282명, 경찰 111명 등 총 3,409명이 피 흘려 지킨 전사에 유례없는 격전이었습니다.
만일 다부동 방어전투에서 실패하면 대구시가 함락되고 부산 함락이 분명한 상황인데 백 장군은 “이제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 여기서 밀리면 미군도 철수한다. 그러면 대한민국은 끝이다. 사단장인 내가 앞장서겠다. 내가 두려움에 밀려 물러서면 나를 쏴라.”고 하며 국군 역사에서 적진으로 직접 돌격한 유일한 사단장이며 장군이었습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백선엽 육군대장님. 육군장의 장엄한 장례예식을 영상으로 보며 당신은 평생 군인중의 군인으로 의무(Duty)와 명예(Honor)로 국가(Country) 건설에 몸 바치신 전쟁영웅이요, 우리 육군의 아버지입니다.
백 장군님의 유지로 강한 군대육성과 자유민주 대한민국의 번영과 굳건한 미 혈맹의 발전을 위해 전진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삼가 명복을 빕니다.
<이병희 미동부재향군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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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처단받지 않고 오히려 그 친일매국노가 한국사회 모든 분야의 기득권을 장악하고 대물림해 온 한국현대사의 저주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백선엽과 같은 일본군 출신 귀태 박정희는 백선엽과같은 일본군 출신 매국노 군인들에 의해 키워졌다.백선엽의 추악한 인생 시라카와 요시노리는 상하이 파견군사령관 관동군 육군 대신· 군사 참의관 등 일본의 여러 요직을 역임한 군인으로,1932년 4월 훙커우 공원에서 벌어진 천장절 축하 행사에서 윤봉길이 던진 폭탄에 맞아 중상을 입었고 1932년5월 폭탄으로 사망한 시라카와로 창시개명한 친일 반역자였다.
1)백선엽의 추악한 인생 중 위 내용에서 빠진 사실 39년 평양사범학교를 졸업, 잠시 교편생활 후 만주국의 봉천군관학교를 이수하고 일왕히로히토에게 충성맹세하고 간도특설대에서 중대장으로 근무하면서 독립군에 총질했던 악질 친일파! 특히 일본군 간도특설대에서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독립군들을 잡아 죽이던 백선엽같은 악질 친일매국노는 한국이 친나치 민족반역자 수십만 명을 철저히 숙청한 프랑스나 다른 유럽 나라들처럼 정상 국가였다면 해방이후 가장 먼저 사형에 처해졌을 인물이다. 백선엽의 추악한 인생은 해방이후 단 한 놈의 친일매국노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