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이 지구 전체를 압도해 버렸다. 인간 모두가 포자씨처럼 허공으로 흩어져 존재감을 상실해 가고 있는 분위기다.
불후의 명작 ‘레미제라블’을 쓴 빅토르 위고는 주인공 장발장을 통해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본 사람이 아니면 인생의 참맛을 모른다”라고 했다. 이제 위고의 설파를 승화시켜 “코로나 바이러스의 고독, 슬픔, 평화의 참맛을 전율해 보지 않고서는 삶의 원론을 꺼내 들지 말라”고 해야 할 단계인 것 같다.
분주한 나의 생활 습성이지만 고독을 즐기는 나만의 취향도 있다. 심오한 인생철학을 사색하는 것도 아니고 막연히 무념의 상태로 빠져 들어가는 버릇이 언제부터인가 몸에 배어 버렸다. 그래서인지 코로나 바이러스의 잔인성을 증오하면서도 한편으로 그가 만들어 낸 인간 단절, 이 기묘한 풍속도를 저항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레프 톨스토이는 나이 50을 넘어서 ‘참회록’을 썼다. 갖가지 편력과 방탕 등 순수한 그의 양심술회가 값진 교범이 되어 내 고독의 시간을 채울 때도 있다.
지난 5개월 간 코로나 바이러스의 부산물로 내게 던져진 고독의 시간, 값진 시간이었든 무의미한 시간이었든 상관없이 내 인생 역정에 잊지 못할 회억으로 뚜렷이 남을 것만 같다.
고독의 긴 시간 동안 몇 번이고 끝없는 우주공간을 헤매고 돌아오기도 했다.
이 생소한 경험에 취해 나 스스로에 대한 갖가지 궁금증을 풀다 말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먼지보다도 더 작은 미립자로 허허공공 구만리장천을 부유하다 창세기 때 기적적으로 지구에 내려앉았고, 그리고 어찌어찌 수백만 년의 세월이 흐르고 그리고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도대체 ‘나’라는 존재가 무엇인가, 소년처럼 자칫 유치한 상상 앞에 민망함이 저며 들기도 한다.
수처작주(隨處作主), 어느 곳에서나 자리 잡고 앉아 주인이 되라는 말이다.
석가모니가 본래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을 깨닫고 영원으로 니르바나 성령을 얻으면 됐지 무슨 형상이 필요한 것이냐고 가르친 것이다. 예수의 산상기도, 독방 홀로기도, 그 모습을 상상하며 다시 한번 교회나 절에서 예배나 불공을 드려야만 하느님을 만나는 것인지, 득도에 이르는 것인지, 고독이나 외로움이 ‘참진리’를 터득하는 지름길임을 일깨우는 것 같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팬데믹 광풍은 놀랍게도 인류의 새로운 신앙 풍속도를 창출해 내고 있는 것만 같다.
이 새로운 풍속도는 ‘방하착(放下着)’을 본령으로 제시할 것 같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마음의 평안을 얻어 정착하라는 불타의 가르침이다. “병 속에 바나나를 움켜쥐고 있는 원숭이는 결코 손을 뺄 수가 없다. 손에 잡은 것을 풀어 놓아야만 병에서 손을 빼 낼 수가 있다” 집착을 버려야만 자유로워지는 것이 진리이다. 모든 인류가 매일같이 쉬는 시간도 없이 더 많이 소유하고, 더 잘 먹고, 더 잘 입고 터무니없이 더 높아지려는 탐욕에 속박돼 있지 않은가.
인류 문명에 대한 자학적 사고인가 끝 모를 AI(인공지능)의 진도는 로봇 아내, 목사, 반 고흐와 파블로 피카소보다 더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화가, 베토벤이나 모차르트보다 더 감동적인 작곡가를 만들어 낸다.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수명을 좌우하고 우주공간을 제멋대로 여행할 수 있는 날이 다가오고 있다. 이런 현상들 모두가 ‘신의 영역’을 인류가 침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이런 추악한 집념 앞에 코로나 형벌의 등장은 필연일 수밖에 없다는 충동이 밀려온다. 물론 ‘잘못 배운 놈들’, 얼치기 논리, 교언영색(巧言令色), 곡학아세(曲學阿世), 세상 어지럽힘도 코로나 등장에 한몫했을 것이다.
길고 긴 코로나바이러스로 내게 던져진 고독의 시간을 공개하자니 그 내용이 너무도 다채롭다. ‘중용의 도’를 가르친 장자는 “호랑나비가 되어 밤새도록 꽃밭을 날다가 깨어나서 ‘호접몽(胡蝶夢), 현실 세상과 영혼의 세계가 하나인 것에 감탄했다. 장콕토의 자유에 대한 열망, “내 귀는 하나의 소라껍질, 그리운 바다의 물결 소리여”라고 어떤 그리움을 절규했고, 알프레드 테니슨은 ‘스완송’을 읊어 일평생 한번 밖에 부르지 않는 백조의 노래를 갈망했다.
고독은 어찌 보면 무한대의 공간이다. 슬픔도, 기쁨도, 낭만도, 애련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의 무한대 공터다. 황혼 무렵 외롭게 ‘술 익는 마을’을 걸어가던 박목월은 “구름에 달 가듯 가는 나그네”라고 고독을 노래했다. 원로 영문학자 변만식의 영문 번역시가 한층 더 양 미간을 자극해 온다.
‘덕불고(德不孤)’, 사랑으로 덕을 베풀고 살아가면 결코 외로울 수 없다는 공자의 가르침이다. 코로나 위세에 굴복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우리에게 밀어낸 고독이라는 화두와 어떻게 어울리고 있는지를 누구에겐가 고백하고 싶었다. 내게 있어 코로나 고독과의 신비스러운 스토리는 계속 이어질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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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용 전 한민신보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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