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과 2020년 5월 뉴욕시와 미니애폴리스에서 경찰에 ‘목 조르기’ 제압을 당하던 중 ‘숨을 쉴 수 없어요’(I can‘t breathe)라고 절규하며 숨져간 흑인 에릭 가너와 조지 플로이드 사건은 판박이처럼 닮아있다. 플로이드와 가너는 처음 경찰을 마주한 순간부터 단 한 차례도 물리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경찰의 무릎에 목이 졸려 숨을 거둘 때까지 ‘숨을 쉴 수가 없어요’라고 절규한 횟수마저 공교롭게도 11차례였다.
이들이 경찰에 체포된 사유는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플로이드는 20달러짜리 위조지폐 사용을 의심받았고, 가너는 불법 담배판매 혐의 때문이었다. 경찰 공권력에 의한 살해라고 할 수밖에 없는 ‘목조르기’ 제압으로 숨진 가너와 플로이드 두 사람은 가난한 흑인 남성들이었다.
두 사람이 숨져간 동영상을 보며 가슴 아프고 쓰라렸던 것은 건장한 체격의 두 흑인 남성 모두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경험했을 폭력적인 공권력 앞에서 체념한 듯 아무런 물리적 저항도 보이지 않은 점이다.
가너 사건에 천착했던 독일의 저널리스트 카롤린 엠케는 자신의 저서(‘Gegen Den Hass’ 영역본 ‘Against Hate’, 한국어 번역본 ‘혐오사회’)에서 바로 이 점을 지적했다. 엠케는 가너의 동영상을 보며 가장 인상 깊게 새겨진 순간이 ‘숨을 쉴 수 없다’고 11차례 절규하는 부분이 아니라 그의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좌절감이었다고 토로했다. 경찰이 덮치기도 전에 ‘이런 일은 오늘로 끝나야 돼’(It stops today)라고 말하는 가너의 목소리에서 살아오면서 수없이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당해야했던 흑인의 좌절감이 묻어난다.
엠케는 가너가 죽기 전 토해낸 ‘It stops today’ 절규는 수없이 검문과 몸수색을 당하며 공권력을 빙자한 폭력 앞에서 느꼈을 길고 긴 공포와 고통을 보여준 것이라고 지적했다. 가너와 플로이드가 숨지면서 느꼈을 무력감은 수백년 간 지속되면서 결코 변하지 않을 것처럼 공고하게 구조와 체계로 굳어져버린 ‘혐오 시스템’에 대한 좌절이라는 것이다.
뚜렷한 이유 없이 경찰의 검문을 받는다면 처음엔 불편하고 번거로운 마음이 들더라도 감수하지만 이유 없는 검문이 반복돼 매번 신원을 증명하고, 몸수색을 당하며, 자신의 행동의 합법성을 입증해야 한다면 이는 멸시이자 모욕이며 체계적이고 구조적인 혐오의 경험이 된다.
알튀세르의 말처럼 이념이 개인을 주체로 호명하듯 구조적이고 체계적인 혐오 역시 개인을 호명한다. 경찰이 거리에서 “헤이 거기 당신!”하고 부를 때 뒤돌아보는 개인은 혐오의 체계와 구조에 호명당하며, 구조화된 혐오의 프레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된다.
혐오가 구조화된 사회에서 멸시와 차별, 배제의 강철 화살은 유색 인종, 이민자, 성소수자, 노숙자, 빈곤층을 겨냥한다. 피해자가 저항할 수 없는 약자들이기 때문이다. 혐오가 구조적으로 내재된 사회에서 이들이 혐오와 차별, 배제와 멸시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사회나 조직에서 배제되거나 사회적 또는 사법적 처벌을 감내해야하며 심지어 목숨까지 감수하는 큰 비용을 치러야 한다. 가너와 플로이드의 무력감과 좌절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차별과 배제, 멸시와 경멸이 일상화된 ‘혐오 사회’에서 다수 또는 ‘노멀’과 다른 자신의 피부색, 성정체성, 출신지역, 종교, 옷차림새, 몸짓, 말투 등에 대해 늘 해명하고 변호해야 하는 사람은 저항보다 무기력한 침묵을 택하기도 한다.
혐오의 가해자들에게도 이들은 손쉬운 먹잇감이다. 사회적으로 널리 통용되는 선입견과 편견, 고정관념에 딱 들어맞는 이들에게 혐오의 강철비를 쏟아내도 뒤탈이 없고, 다수의 동의마저 얻어낼 수 있으니, 얼마나 손쉬운 먹잇감인가.
숨을 쉬든 말든, 죽을 수 있는 상황이거나 말거나 아무래도 상관없는 경찰의 잔혹함 그리고 냉담함은 그렇게 해도 별 뒤탈이 없다는 것을 아는 자의 ‘혐오 공격’이다.
플로이드와 가너의 목숨을 앗아간 ‘목 조르기’ 제압은 더 이상 용인되지 않는다. 캘리포니아에는 지난 5일 주지사의 명령으로 ‘초크홀드’(Chokehold)와 ‘카르토이드 홀드’(Cartoidhold) 등의 ‘목조르기’ 제압 사용이 금지됐고, 트럼프도 ‘목조르기’ 제압을 금지하는 명령에 서명했다. 경찰의 ‘목조르기’ 제압이 사라진다고 해서 집단 구성원에 내재화된 ‘혐오’의 ‘목조르기’ 체계가 쉽게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특히 같은 편견과 고정관념을 공유하고 위협적이고 모욕적인 말과 행동, 따돌림의 방식으로 내재화돼 철옹성을 구축한 혐오체계는 쉽사리 무너뜨리기 어렵다. 바로 우리 자신의 내부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서다. 사회적이고 제도화된 혐오에 맞서기 전 우선 우리 자신을 성찰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 자신 속에 ‘혐오의 목조르기’가 관습이나 편견, 고정관념의 모습으로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들여다봐야 한다.
상대적 우월감으로 타인종을 혐오하거나 배척하지는 않는지, 합법체류·영주권자·시민권자란 우월감에 서류미비 이민자 이웃의 목을 조르고 있지는 않는지, 바이블을 한 손에 들고 성소수자를 배척하고 있지는 않는지. 부끄럽지만 그래도 들여다보며 스스로 성찰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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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목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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