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하늘에도 슬픔이’… 노름꾼 아버지, 집 나간 어머니, 어린 동생들을 둔 소년 가장의 눈물겨운 삶을 그린 60년대 영화이다. 그 시절 삶의 무게가 너무 버거워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던 엄마가 우연히 들어간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고 ‘내가 없어지면 내 자식들이 저 꼴이 되겠구나’ 싶어 다시 살아보기로 결심하게 만든 고마운 영화이다. 그 후로도 몇 번 삶을 포기하고 싶은 위기가 찾아왔고, 그때마다 ‘내가 없어지면…’의 생각으로 다시 거친 세파에 맞서 삶을 살아 내셨다. 엄마는 평생 내 마음을 아리게 했다. ‘엄마’라는 단어만으로도 가슴에 눈물이 맺힌다. 한과 고달픔으로 점철된 돌밭 같은 인생 길을 자식이라는 더 큰 바윗돌을 굴리며 버텨온 인간 승리의 애잔함이 사무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낙엽들이 햇살에 반짝이며 바람에 뒹굴던 지난 가을 어느 날… 카톡 알림이 떴다. 한국에 계신 엄마가 위독함을 알려왔다. 갑자기 다리가 후들거리고 목구멍이 말랐다. 손끝이 얼어붙고 심장이 방망이질 했다. 몇 시간 후, 기어이 엄마가 떠나셨다는 연락이 오고야 말았다. 순간, 몸과 마음에 정적이 흘렀다. 시간이 멈춰 버렸다. 시스템 작동에 오류가 생긴 듯, 모든 생각과 감정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눈으로 읽은 메시지가 뇌를 거쳐 몸의 각 부위로 명령을 전달하는 일련의 과정이 삐걱거리며 정보 처리에 애를 먹는 듯했다. 잠시 후 심장 저 끝에서부터 말발굽 소리 같은 것이 들려오고, 뱃속 깊은 곳에서 작은 덩어리들이 엉기며 서서히 밀고 올라왔다. 그러더니 온몸이 동시 다발적으로 반응을 폭발해낸다. 목구멍은 ‘엄마!”를 외쳐대고,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뿜어져 나온다. 뱃속의 덩어리들이 밀고 올라와 헛구역질을 하고, 온 몸이 떨리면서 각 조직들이 멀미하듯 흔들린다. 몸 안에 있는 수십 조의 세포가 하나씩 다 열리며 울음을 토해내는 듯… 도무지 멈출 줄 모른다.
그날, 엄마의 죽음 앞에 몸부림치는 딸의 모습 속에서, 난 죽음의 실체를 보았다. 누가 죽음의 위력을 비웃겠는가? 어찌 죽음을 미화하겠는가? 사상이나 소설에서 포장된 죽음이 아니라, 현실에서 맞닥뜨린 죽음은 흑암이요 절망이고, 무질서와 혼돈이며, 잔임함과 파멸이다.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휘감아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공포의 저 끝으로 내동댕이 쳐버리는 거대한 엔트로피의 위력… 누가 이 자연의 법칙을 거스를 수 있겠는가? 세상이 놀랄 능력으로 천하를 호령했다 한들 시커먼 죽음의 사정권에 들어서면 고양이 앞에 놓인 쥐처럼 대항할 의지마저 상실하고 꼼짝 없이 쪼그라드는 인간의 운명이여…
과연 그런 것인가? 인간은 점점 노약해지고 병들고 쪼그라드는 버팀 끝에 존재를 거두어야만 하는가? 젊음은 늙음을 향해, 건강은 쇠약함으로, 질서는 무질서쪽으로 일방통행만 하는 것인가? 이 자연의 법칙을 역행할 길은 없는가? 늙어 쭈글쭈글해졌던 피부가 다시 탱탱해지고, 힘이 없던 다리에 뼈와 근육과 힘줄이 되살아나 벌떡 일어나 걷게 되고, 침침하던 시력이 회복되어 또렷이 보게 되고, 멈추었던 심장이 다시 뛰고, 썩어 냄새 나는 몸의 세포가 다시 살아나는 이런 일은 불가능한 것인가? 자연 법칙의 그릇에서 흘러 넘쳐 ‘기적’이라고 분류된 이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가? 현재보다 나은 미래는 어떻게 가능한가?
프랑스의 철학자 베르그송은 우주내의 ‘물질’은 엔트로피의 법칙을 따라 흘러 가지만, ‘생명’은 능동적 변화를 일으킨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즉, 모든 생명은 무한한 역동적 에너지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 에너지의 폭발적인 힘을 통해 새로운 생명으로의 도약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에너지의 폭발적인 힘을 ‘엘랑비탈’이라 했다. 엔트로피가 죽이고 파멸시키는 현상이라면, 엘랑비탈은 그것을 거슬러 우주 내에 창조적 생명활동을 일으키는 힘이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엘랑비탈의 개념을 통해 “인류 역사는 도전과 응전의 역사”라는 놀라운 통찰력을 제시한 바 있다. 양쯔강을 제치고 황화강에서 문명이 발생한 것은 황화강의 사람들이 그들이 직면한 역경과 고난의 도전에 대해 능동적으로 응전한 결과라는 것이다.
죽음과 파멸을 뚫어내는 엘랑비탈의 약동성…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죽음의 그늘에서 잠시 엔트로피의 조롱거리가 된 듯했지만 도저히 죽음이 누를 수 없는 폭발하는 생명의 약동성으로 다시 살아나 사망을 호통친 이의 음성이 들려온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있는 한 여인, 더 이상 불쌍하고 나약한 모습이 아닌 당당하고 아름다운 멋진 나의 엄마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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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리 (선교사, 버클리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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