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GA 클래스 A 멤버에 입성한 한인 프로 1호 고 현준선 씨
▶ 6.25전쟁 당시 험난한 여정 거쳐 진남포에서 부산행, ‘한인사회의 매스터스’ 백상배 골프 제2회 대회 우승… 골프와의 만남도 결혼도 한 편의 드라마 연상케 해
현준선 프로는 1985년 PGA 클래스 A 멤버에 입성, 한인 프로 1호가 됐다.
고 현준선 프로는 운명적으로 골프와 만나 평생 골프를 사랑한 미주한인사회의 기념비적인 골퍼로 한인 골프애호가들의 깊은 존경을 받고 있다. 지난해 83세 생일을 기념해 라미라다 골프코스에서 지인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사실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버지는 골프만 생각하면서 골프에 모든 인생을 바치신 분이셨습니다” 지난 5월27일 폐암으로 84세에 별세한 골프계 원로 현준선 프로의 외아들 에릭 현씨는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가지지 못해 서운하고 외로운 적도 많았지만 아버지의 멋진 골프 인생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미주 한인사회 올드타이머이자 한인 PGA 프로 1호로 잘 알려진 골프계 원로 현준선 프로는 지난 1935년 10월5일 북한 진남포에서 4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일제치하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15세에 6.25전쟁이 발생해 넷째 형과 함께 남한으로 피난을 내려왔다.
그는 6.25전쟁 당시 형의 손에 이끌려 단 둘이 먼저 항구로 나가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바람에 아수라장이 되어 결국 한 미국 상선을 타게 되었고 인천 도착후 일본 연락선으로 갈아타고 부산으로 가게 되었다. 부산에 도착후 정보부 요원들의 조사를 받고 그는 해운대의 한 집으로 갔는데 한 방에 20여명이 수용되는 좁은 곳으로 화장실이라도 가면 자리는 없어질 정도였다.
당시 현 프로와 넷째 형은 탄약 나르는 일을 해야 했는데 155밀리 포탄을 산에 쌓아 올리는 일이었다. 트럭에서 내리는 포탄 궤짝(포탄 2개)을 어깨에 매고 무릎이 주저 앉을만큼 고통스러웠지만 있는 힘을 다해 일했다. 여름에는 아이스케키 통을 메고 나갔지만 대낮에는 자존심 때문에 도저히 “아이스케키” 라고 소리를 지를 수가 없어서 밤에만 나가 장사를 했었다. 넷째 형은 육군 보병학교에 간 후 처음엔 부두 노동을 시작 했지만, 나중에 부산역 앞 명동장이라는 곰탕집에 취직하며 일을 하게 되었고 형이 제대 후 한성 고등학교 훈육 주임으로 재직하게 되며 한성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이후 연세대학교 화학공학과에 입학해 재학중 군에 입대했다. 제대 후 연대 화학공학과에 복학해 학업을 마친 후 당시 동신화학 사원으로 일하며 미국 이민을 준비했다.
태권도가 미국에서 인기가 많다는 정보를 얻어 태권도 사범이 되기로 결심하고 한국에서 태권도를 열심히 배웠다.
현준선 프로는 드디어 29세의 나이에 청운의 꿈을 안고 1965년 5월10일 미국 LA에 이민와 이후 미네소타주의 미니애폴리스로 이주를 했다.
처음에는 골프가 아닌 태권도장을 운영하면서 미국에 정착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한인들이 그다지 많지 않았던 미니애폴리스에서 태권도 사범을 하면서 나중에는 6개의 태권도장을 운영할 만큼 성공하면서 기반을 잡았으며 1971년 8월21일 릴리 현씨와 연애결혼했다.
릴리 현씨는 중학교 때 하와이로 이민왔고 Northwest 항공의 스튜어디스로 일하다가 현 프로와 운명적인 만남이 이뤄진다. 그녀는 하와이-미니애폴리스 노선에서 근무했는 데 어느 날 미네소타 지역 신문에서 현 프로의 태권도 기사를 접하고 당시 한인이 거의 없었던 미니애폴리스에서 같은 한인으로서 큰 자부심을 느껴 힘을 실어주려고 현 프로의 태권도장으로 연락해 자랑스럽다는 말과 함께 간단한 통화 후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얼마 후 현 프로는 공항에 연락해 수소문 끝에 그녀의 연락처를 알아냈고, 그후 그녀가 미니애폴리스 노선을 탈 때마다 만나 데이트 하며 사랑을 쌓은 후 71년 드디어 결혼을 하고 5년후 41세의 늦은 나이에 외아들을 두게 되었다.
당시 평생 태권도 사범으로 끝날 뻔 했던 그의 인생에 골프와의 숙명적인 조우가 이뤄졌다. 현 프로가 골프에 입문한 나이는 34살. 취미로 골프를 시작하기에는 적당한 나이지만 프로입문을 하기는 다소 늦은 감이 있었음에도 그는 우연한 기회에 친구와 내기를 하던 중 골프에 대한 재능을 발견했다. 연대 동문과 우연한 기회에 골프연습장을 찾아 내기를 했고 뜻하지 않게 원하는 방향으로 골프를 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첫 몇 달 연습으로 90타를 치고, 다음해 80타, 그리고 70타를 치면서 골프에 대한 자신감이 생긴 현 프로는 늦은 나이에 골프의 매력에 푹 빠져서 결국 골프 프로가 되겠다고 결심 후 미네소타의 6개 태권도장을 제자들에게 모두 무료로 나눠주고 1978년 LA로 이주했다.
그해에 현 프로는 한인들에게도 친숙한 랜초팍 골프코스에서 티칭 프로로 시작해 몬트레이팍 골프장 헤드프로를 역임하며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인 끝에 마침내 1985년 PGA 클래스 A 멤버에 입성, 한인 프로 1호가 됐다. 이 과정에서 한국일보가 주최하는 한인 미주오픈인 제2회 백상배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한인사회에 이름을 알리기도 했다.
현 프로의 도전정신은 그러나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투어 프로생활을 위해 PGA 챔피언스 투어(당시는 시니어 투어)에 도전장을 내밀었고 바로 50세 생일날 ‘힐튼 헤드 시니어 인터내셔널 토너먼트’ 예선을 위해 사우스캐롤라이나로 날아가 PGA 투어에 합류하며 평생 잊지 못할 감격을 경험했다.
현 프로는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첫 출전인 당시 대회에서 첫날 이븐파를 쳤는데 같은 스코어를 기록했던 아놀드 파머와 다음날 같은 조에 편성된 거예요. 또 마지막 날에는 브리티시 오픈을 5회나 우승한 당시 최다 상금 보유자 피터 탐슨도 같은 조에 합류했죠. 골프계의 전설이자 거장인 이들과 함께 라운딩한 벅찬 기억은 지금도 잊혀 지지 않습니다. 투어 입문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던 거죠”라고 소감을 밝힌 바 있다.
이후 2000년 PGA 시니어 챔피언십 대회를 마지막으로 현역 선수생활을 마감할 때까지 현 프로는 모두 27차례 투어 본선에 진출했고 서던 캘리포니아 시니어 PGA 챔피언에 2번이나 올랐다. 현역 투어프로 은퇴 후 현 프로는 고령의 나이에도 어떻게 하면 쉽게 칠 수 있는지 연구에 몰두했고 1981년부터 본보에 40년 가까이 골프칼럼을 기고하면서 한인들의 골프 길라잡이 역할을 자처했다.
34세의 늦은 나이부터 50년 가까이 골프에만 매진한 현 프로는 백상배 심사위원장 등으로 30년 넘게 봉사하면서 자신이 평생 연구해온 골프의 기술을 되도록 많은 한인골퍼들에게 전해주었다. 현 프로의 장남이자 외아들인 에릭 현씨는 현재 베벌리힐스 경찰서의 서전트로 18년간 경찰로서 시민들의 공복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아버지가 살아오신 삶을 보면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모든 것에 끊임없는 도전과 최선의 노력을 하며 인생을 바치신 분임이 확실하다”며 “자신도 부친의 삶을 따를 것“이라고 밝혔다.
고 현준선 프로의 유가족으로 부인 릴리 현 여사와 장남 에릭, 2명의 손녀가 있다. 고인의 장례식은 코로나19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된 후 가족장으로 치러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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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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