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ATIA 대표 박관웅 선교사·서니 박 타워에스크로 사장 부친 박이한 전 재미한국노인회장
▶ 공산치하 북에서 월남, 쪽배 표류로 천우신조로 살아, 25년간 밀양 베다니 고아원 운영, 150명 전쟁고아돌봐…미국에 이민와서 2012~2014년 재미한국노인회장 봉사
6.25전쟁 고아들을 돌보면서 4반세기의 삶을 헌신했던 박이한 회장은 미국에 건너와서도 불우한 노인의 삶을 돌보는 등 평생 이웃사랑을 몸소 실천하신 분이었다고 유가족측은 회고했다.
“아버님은 헐벗고 굶주린 한국전쟁고아들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희생한 분이셨습니다”
지난 23일 93세의 나이에 별세한 박이한 회장(사진)의 삼남 박관웅 선교사는 “150명의 고아들을 어떠한 댓가도 바라지 않고 잘 돌보고 교육시킨 것은 그분의 끈임없는 자기희생과 이웃사랑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박이한 재미한국노인회장은 1926년 8월5일 북한 평양에서 2남2녀 중 세째아들로 출생, 위로 2명의 누이와 남동생이 있었으며 집안은 고기잡이 배도 있고 농사지으며 해산물도 수확할 수 있는 경제력이 있는 중산층 가정에서 성장했다. 해방후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을 피해 21세에 모친의 권유로 평양에서 쪽배를 타고 뱃사공과 함께 인천 백령도로 남하하는 도중 배가 바다에서 일주일 정도 표류하는 등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간신히 목숨을 건 탈출에 성공, 대한민국의 자유의 품에 안기게 된다.
그후 1950년 6.25전쟁 때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잘 곳도 없으면서 생사가 엇갈리는 현장에서 숱하게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고 서울에서 부산으로 피난갔지만 대한민국이 공산치하에 놓여서는 안된다는 구국의 일념으로 의무병으로 입대, 1953년 국군참전 유공자로 제대하게 된다. 6.25전쟁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전쟁고아가 생겨나는 것을 목격한 박회장은 갈 곳없는 고아들을 자신이 돌보는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한다. 1953년 밀양 감리교회에서 목사의 소개로 만난 박순규씨와 결혼하면서 ‘성결교단의 사부’로 불리는 이명직 목사와의 만남이 박회장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박관웅 선교사는 “모친의 큰 아버지인 이명직 목사가 부친에게 ‘남자가 되려면 모름지기 성경을 백번 읽어봐야 하지 않나’라는 말씀을 통해 부친의 영성이 깊어졌고 전쟁고아를 돌보는 육영사업을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했다.
전쟁고아를 돌보는 삶을 위해 한 평생을 바쳐야겠다고 결심한 박회장은 1953년부터 밀양 베다니 고아원을 설립해 오갈 데 없는 150명의 전쟁고아를 거둬 이들을 교육하고 돌보는 삶을 시작했다. 1955년 부인과 함께 중앙대학 사회사업과를 졸업하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고아원 육영사업에 투신하게 된다. 고아들을 돌보기 위해 경제적인 기반이 필요했기 때문에 밀양에서 방직공장을 운영해 명주, 카펫 등을 생산하게 된다. 이곳에서 고아들이 직원으로 일하면서 사회에 진출해 독립할 수 있도록 돕고 1970년대 초반 부산에서 유명 순두부 식당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 와중에 무역업에도 진출해 번 돈을 모두 고아들의 육영사업에 쓰면서 25년간을 헌신해 고아들이 성공적으로 독립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운 공로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수 차례 공로상도 수상했다. 이처럼 박회장이 4반세기를 고아들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배경에는 부인 박순규 권사의 끊임없는 기도가 큰 몫을 했다. 고아들이 다 장성해서 사회에 진출하는 것을 지켜 본 박회장은 1978년 자녀교육을 위해 미국 LA에 이민왔다.
이민 초창기에 흔히 이민 초년병이 겪는 코스인 청소, 페인팅, 노점상 등을 거쳐 마켓을 운영했다. 박관웅 선교사는 “1978년 대학생 시절에 아버지와 베니스 비치 해변가에서 선글래스를 같이 파는 노점상도 하면서 밑바닥부터 생활기반을 다졌다”고 말했다.
박회장은 미국생활이 안정을 찾아가면서 노인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가난한 독거노인들을 돕는 봉사활동을 하면서 지난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재미한국노인회장을 역임했고 현재 올림픽과 놀만디에 위치한 한인타운 시니어 커뮤니티 센터가 설립되는 초석을 닦기도 했다.
박관웅 선교사는 중년의 나이에 평범한 직장인의 삶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목사가 된 이유를 아버지의 삶에서 찾았다. 그는 2007년 7월7일 목사안수를 받고 주님의 영광교회에서 부목사로 있다가 2015년에 정식으로 선교사로 파송받고 IATIA라는 크리스천 비영리단체대표로 LA의 노숙자를 돌보는 홈리스 목회를 현재 진행하고 있다.
박관웅 선교사는 “미국오기 전 까지 고아원에서 고아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부모님의 귀한 삶을 배우고 훈련받은 저는 이제 미국에서 ‘fatherless’ 대신 수 백명의 ‘homeless’ 들을 돌보고 교육하는 아버지 박이한 장로님, 어머니 박순규 권사님의 귀한 열매”라고 고백했다.
그는 “부친이 근면하고 성실한 가운데 평생 이웃사랑을 몸소 실천하신 분이었으며 북한에서 쪽배를 타고 월남해 밀양에서 고아원을 운영하고 미국에 이민와서도 노인들의 복지를 위해 힘쓰는 등 항상 개척하고 도전하는 프로티어 정신으로 일관하신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박회장은 이산 가족으로 북한에 남아있는 형제들을 평생 잊지 못해 2005년 실제로 북한을 방문했지만 평양에 살았던 형제들과 조우하는 꿈은 끝내 이룰 수가 없어 가슴아파했다고 한다. 박회장은 1978-2007년 나성중앙감리교회/밸리연합감리교 장로, 2007년부터 주님의영광교회 장로로 시무해왔다.
박회장의 막내 딸 서니 박 타워에스크로 사장(LA글로벌CEO 6기·LA글로벌 CEO 총원우회 부회장)은 “부친이 북한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혈혈단신 남한에 내려와 가정을 일구셔서 그런지 정말 가족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차고 넘쳤다”며 “자신은 막내딸로서 부친의 사랑을 듬뿍받고 성장했다”고 밝혔다.
서니 박사장은 “자신이 사회사업 및 커뮤니티 서비스에 많은 관심을 갖고 봉사하는 계기도 아버지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박이한 회장은 2016년 4월20일 83세에 작고한 부인 박순규 권사와의 사이에 장남 관철(작고), 차남 관은(작고), 삼남 관웅, 장녀 관희, 차녀 선용(서니) 등 3남2녀의 자녀와 3명의 손자, 5명의 손녀를 두었다.
박회장의 손녀 신솔라 양은 대학졸업작품으로 만든 동영상 기록영화 ‘할아버지 Harabeoji(Grandpa)-My North Korean Grandfather’(https://youtu.be/4Z-M-l63_24Z)를 통해 “고등학교때 배웠던 한국전을 통해서 한국문화와 유산에 대해 너무 단편적으로 알고 있었는 데 동영상 기록영화를 만들면서 자신은 할아버지와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너무 편안하게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며 “목숨을 걸고 남한으로 건너와 새로운 삶을 개척한 할아버지의 개척자적인 삶을 다음 세대에 전하는 소중한 사명을 인식하게 되었고 할아버지를 이해하고 존경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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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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