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있는 시간과 함께 자연스럽게 유튜브를 시청하는 시간도 늘어났다. 그리고 한참 “부부의 세계” 몇 장면을 돌려본 탓인지 유튜브 알고리즘이 나를 박막례 할머니 채널로 이끌었다. 그리고 나는 완전 뒷북이지만 “또라이 세계”를 외치며 몇 년 묵은 체증도 싹 가라앉게 하시는 시원한 욕쟁이 박막례 할머니의 팬이 돼버렸다.
이미 백만을 넘는 구독자에 구글 CEO까지 만나고 오신 소위 월드 스타시지만 할머니 영상을 정주행하고 자서전까지 읽은 열성 팬의 시점으로 할머니를 간략하게 소개하는 시간을 가지겠다. 1947년 출생, 막내딸이라 해서 이름도 대충 지어 막례. 딸이 글을 알게 되면 집 나가버린다는 말에 글도 제대로 못 배우고 온갖 막노동을 하며 살아오셨다. 시집가서도 가난과 투쟁하며 남의 음식만 평생 차려주며 자식 손주들 열심히 키운 평범한 할머니다.
박막례 할머니가 유튜브 스타가 된 계기도 남다른데 할머니가 치매에 걸리실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친손녀 김유라씨가 할머니를 데리고 세계여행을 떠난 것이 시작이라고 한다. 가족들끼리 보자고 올린 재밌는 여행 영상이 폭발적인 반응을 얻자 이것이 할머니의 존재 가치를 스스로 각인 시켜 궁극적으로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고 판단한 유라씨가 다양한 콘텐츠로 크리에이터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콘텐츠를 보고 있자면 정말 다양하다. 메이크업 영상부터 드라마 리뷰, 가끔은 손녀분과 게임도 하시고 따님과 시원하게 말싸움도 망설이지 않으신다. 이렇게 다양한 영상 가운데 공통으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단연 할머니의 고생한 세월을 대변해주는 억척스러움과 또 단번에 그 세월을 무색하게 하는 순수함이라 할 수 있겠다.
할머니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요즘 애들 일들”에도 과감히 “연병허구 있네!”로 시작하는 일침을 외치시며 변해버린 세월 앞에서도 당당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귀신 얘기 해달라 했더니 서럽게 살아온 본인 인생이 제일 무섭다고 답하는, 한마디로 더 이상 무서운 것도 없는 진짜 어른이다.
본인이 살아온 무서운 날들이 무색하게도 할머니는 새로운 도전 앞에 아이같이 초롱초롱 빛나곤 한다. 꼭 한 번씩 튕기면서 이런 것들은 왜 하냐고 불평하시면서도 결국은 그 도전에 누구보다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임하신다. 상처받아 보지 않은 아이처럼 순수하게 세상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나는 무슨 아픔이 그리 많다고 어른인 척 무뎌졌는지 반성하게 된다.
나를 울린 그녀의 도전은 사실 지상파 방송국 시상식, 패러글라이딩, 유튜브 CEO 찾기 등에 비하면 너무나 사소한 것이다. 이름하여 무인 기계로 불고기 버거 주문하기! 자신의 키보다 우뚝 서 있는 기계 앞에 보이지 않는 글씨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 때문에 엇비슷한 그림에 겨우 의존해야 하는 험한 여정이다.
야속하게도 시간 초과를 알리는 화면 전환 시간은 왜 이리도 빨리, 자주 찾아오는지. 몇 번이고 못 먹겠다 하시면서 사투를 벌인 끝에 원했던 불고기 버거 대신 맨 첫 화면에 보이는 이름 모를 햄버거와 콜라 같아 보였던 커피를 마주하게 된다. 맛도 없다며 불평하다 할머니는 “에이, 모르겠다!” 하시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불고기 버거를 향한 재도전이었고 그 대목에서 나는 참아왔던 눈물을 흘렸다.
작년에 한국에 잠시 갔을 때 환갑이 되신 부모님도 비슷한 고충을 털어놓으신 적이 있었다. 기계도 무섭고 자존심 상해서 무인 식당 있으면 바로 나온다고 투덜대셨다. 나 있을 때 한번 가보자며 찾아간 식당 안에서 멀찍이 서서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나만 바라보던 모습이 생생히 기억난다. 그때 나는 퉁명스럽게 결제하고 먹는 내내 신경질만 냈다. 이제 늙어가는 부모의 모습을 보는 게 왠지 모르게 억울해서였을까, 훨씬 대단한 일도 해내셨으면서 이게 뭐가 대단하다고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만 반복하는 움츠림이 야속해서였을까.
박막례 할머니의 삶과 고충, 그녀가 보통의 엄마와 할머니로 살아오며 배운 많은 것들과 앞으로 배워갈 세상은 오늘을 노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분들의 현실과 참 가깝다. 먹을 것이 없어 청춘을 억척스럽게 살아오며 차곡차곡 쌓아온 희로애락이 있다. 그런데도 아직 배워야할 것들, 보지 못한 세상은 무궁무진하다. 모든 것이 편리하고 풍족하게 변해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짐을 안고 살아가는 참 희한한 우리 세대를 시기와 애증으로 보듬는 막중한 숙제가 남아있다.
아이, 청년, 노인 할 것 없이 우리는 배운 것만큼이나 배워나가야 할 것들이 많다. 그리고 서로를 채워줄 수 있기에 이해하려는 모든 도전과 알아가려는 빛나는 열정이 아름답다.
<
신선영 (프리랜서)>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