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지일 이민법 전문변호사 부친 강재영 회장
▶ 6.25전투 학도병으로 다리부상속 기적적인 치유
부인과의 운명적인 만남, 60여년 뜨거운 사랑…80년대 한국재계 50위이내 랭크 중원상사 운영
고 강재영 회장은 잠시 교사생활을 거쳐 평생 기업인으로 한번 뜻을 세우면 책임감을 가지고 피나는 노력으로 그 뜻을 이루어냈다고 유족들은 회고했다. 지난해 파더스데이에 가족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부친은 늘 미래를 앞서 생각하고 도전하고 때로는 너무 진취적이어서 힘에 부친 적도 많은 분이었습니다” 지난 13일 88세의 나이에 작고한 강재영(사진)회장의 차남 강지일 이민법 전문변호사는 “그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한 번 뜻을 세우면 무슨 일이 있어도 책임감을 가지고 피나는 노력을 해 그 뜻을 이루어냈던 한국의 전형적인 기업인이었다”고 회고했다.
강재영회장은 지난 1932년 3월15일 부친 강상조씨와 모친 천남이씨 사이에 5남2녀중 세째 아들로 경남 바닷가마을 웅천에서 출생했다. 집안의 형제들이 가정 형편이 넉넉치 않았는데도 모두 천재라고 불리울 만큼 총명했고 강회장은 어린 나이에 학구열이 높아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입학하기위해 시골에서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싣고 혼자 무작정 상경했다. 이후 서울 친척집에 머무르며 같은 반 중학생을 과외로 가르치며 생활했고 어려운 생활 환경속에서 한양대 공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다.
강회장은 6.25전쟁때 학도병으로 나가 다리에 총을 맞아 절단해야하는 절박한 상황속에서도 담당의사를 붙잡고 하루만 더 기다려 달라고 하면서 밤새 하나님께 ‘다리를 절단하지 않게 고쳐주시면 평생 당신의 예배를 지키겠다’며 울부짖는 약속의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강지일 변호사는 “그런데 정말 기적처럼 그 다음 날 의사가 놀라며 어떻게 하루만에 이렇게 치유가 될 수 있냐고 놀라며 절단은 안해도 되겠다고 부친에게 말해 지금까지 정상인의 생활을 할 수 있게 된데 대해 항상 하나님의 은혜라고 간증을 했다”고 전했다.
강회장은 1954년 한양대학을 졸업한 후 수학 교사로 한양고등학교 교편생활을 시작해 훈육주임을 맡았다.
강회장은 교편생활을 해서 모은 돈으로 미국 시라큐스대학의 MBA 과정에 입학허가를 받고 마침내 1956년 미국유학을 결정했다. 그러나 유학을 앞둔 시점에 일본에 있는 친척 집에 잠시 머물고 왔는데 그때 한국과 일본사이의 무역관련사업의 가능성을 보고, 미국유학을 포기하고 사업을 시작하는 계획을 구상했다. 그때 시작한 사업중 하나가 나일론을 최초로 한국으로 수입하는 무역업을 해서 히트를 쳤고 그후 역으로 최고의 실크를 생산해 일본에 수출하는 일을 했다. 강회장이 생산해서 수출하던 실크는 일본 최고의 기모노를 만드는 실크였다. 그는 한국 경제가 어려울 때 한국의 경제성장을 위한 수출입에도 기여했다.
강회장이 60여년 희노애락을 함께 한 부인을 만난 에피소드는 한 편의 드라마를 연상케한다.
강변호사에 따르면 부친이 아직 교직생활을 할 때,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외할머니로부터 딸 졸업식 때문에 숙명여대에 간다는 말을 들었는데 정말 운명적으로 그 졸업식 날 숙명여대에 갈 일이 마침 생겼다고 한다. 거기서 기차에서 만난 외할머니와 우연히 조우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 가족들과 졸업사진을 찍고 있는 어머니를 처음 보고 첫 눈에 반했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러 가족졸업사진에 아버지도 옆에서 같이 사진을 찍었고 모친은 무척 당황했다고 한다. 첫 눈에 반한 모친에게 부친이 첫 데이트를 신청했고 마지 못해 나간 첫 만남에서 부친은 “미주씨, 우리 10월24일 결혼합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모친은 “그때 속으로 이 사람이 돌았구나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깔끔하고 남자다운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렇게 강회장의 선포처럼 결국 두 사람은 1960년 10월24일 결혼해 슬하에 장녀 애린, 장남 지훈, 차녀 애경, 차남 지일, 막내 지태와 4명의 손녀, 3명의 손자를 두게 되었다. 강변호사는 “부친은 모친을 끔찍히 사랑해 때로는 ‘질투의 화신’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며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도 ‘너희 엄마를 잘 부탁한다’라고 꺼지는 작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며 “두 분의 만남은 정말 영화 같은 운명적 만남이었다”고 회고했다.
강회장은 부인 미주씨와의 운명적인 결혼 후 사업을 시작, 1961년 중원상사라는 무역회사를 창업했다. 나일론과 실크및 원단사업을 시작으로 이십년이 넘는 동안 컴퓨터 IT, 가구, 옷, 등산장비, 망상해수욕장 등 여러 분야로 회사를 성장시켜 80년대 중반에는 상장기업으로서 당시 동아그룹보다 랭킹이 한 단계 높은 국내 50대기업으로 급성장했다.
강변호사는 어릴 때부터 “순풍에 돛단배로 인생을 살려고 하지마라,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항상 깨어있어라, 남이 밥숫갈로 절대로 떠먹여 주지 않는다”는 밥상머리 교육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받으면서 성장했다고 전했다. 특히 초등학교 때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독후감을 부친에게 제출해야했고 독후감에는 영어단어와 한문이 함께 있어야했다고 한다. 그래서 4학년때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최영 장군의 독후감 제목을 “Gold 보기를 石처럼 하라”고 써서 부친에게 제출했던 적도 있었다고 웃음 지었다.
강회장은 1981년 10월 미국에 건너와 중원상사의 지사를 설립하면서 자녀들을 모두 미국에 조기유학을 보내 아케디아에 정착시키고 본인은 2002년까지 한국에서 사업을 경영했다. 강변호사는 “1984년 6월 팔로스버디스로 이주해 이곳에서 줄곧 성장하며 교육받고 또 결혼해 자녀들도 팔로스버디스에서 교육시키며 지금까지 살게 된 것도 부친의 가족사랑이자, 선견지명의 결과”라고 전했다.
또한 지난 1988년 ‘Softmart of Korea’라는 컴퓨터 회사를 창업, 대한민국의 신문사들이 사용하는 활자를 기계식에서 컴퓨터식으로 바꾸는 일을 처음 시도했다. 1990년도 일본 아이지에스사와 합작으로 중원아이지에스라는 첨단정보통신사업 회사를 설립해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전화자동응답기 컴퓨터전산시스템을 각종 기관, 은행 등에 도입했으며 사업을 성장시킨 후 현대미디아에 매각했다.
강변호사는 “부친의 실크사업은 일본의 큰 지진으로 공장이 큰 피해를 입어 엄청난 손실을 봤고 또 한국의 IMF 시기와 맞물려, 이런저런 많은 손해를 보고 하나하나 정리를 하면서 몸이 많이 안 좋아지셨다”며 “오래전 대장암과 방광암을 모두 수술 등으로 극복했지만 신장의 기능을 점점 잃으면서 지난해 3개월 선고를 받았지만 1년을 더 지내셨고 당신의 소원처럼 병원이 아닌 가족들의 돌보심을 받으시고 따뜻한 가족들 품에서 영면했다”고 전했다.
한국에서 영락교회에 출석했던 강회장은 미국에 이주한 후 횃불교회(토랜스우리교회), 토랜스제일장로교회에 출석했다. 교회가 코로나19 사태로 예배를 중단하기 전까지 가쁜 숨을 몰아쉬고 계단을 오르기도 힘든 몸을 이끌고 끝까지 하나님께 드린 약속을 지키시는 최선의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강변호사는 “더욱 감사한 것은 부친이 영면하기 바로 전날이 마침 아내의 생일이라 가족들이 모여 부친의 손을 꼭 잡고 노래를 불러드렸고 손주들도 노래를 불러드리며 따뜻한 시간을 가졌는데 그것이 살아 생전에 잡아 본 마지막 손길이 되리라고 상상도 못했다”며 “아버지와의 소중한 마지막 시간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고 강재영회장의 장례예배는 오는 27일 수요일 오후 1시, 고창현 토랜스제일장로교회 담임목사의 집례로 팔로스버디스 그린힐스 묘지에서 가족장으로 열린다. (310)490-7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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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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