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을 연마하는데 같은 산의 돌은 소용이 없다 한다. 성질이 같아서 같은 산의 비슷한 돌을 갈기에는 부적당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다른 산의 성질이 다른 돌을 써야 한다고 한다. 다른 산의 더 거친 돌로 갈아야 비로소 연마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시경에 나오는 ‘타산지석’의 본 뜻으로 알고 있다.
이 풀이를 듣고 나는 깜짝 놀랬었다. ‘타산지석으로 삼는다’- 옆의 모범적인 모습을 보고 잘 따르겠다는 정도로만 인식 했었는데 오히려 반대의 뜻이었다. 내가 따라야 할 롤 모델이 아니라 나를 부숴주고 갈아 줄 거친 돌로 삼겠다는 얘기이다.
한 인생을 살다 보면 별 일을 다 겪게 된다. 천재지변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부딪치는 사람들, 맞딱뜨리는 사건들로 우리의 심신은 무너지고 아파한다. 그럴수록 우리는 방어벽을 치고 두터운 겉옷으로 무장하며 준 전시태세에 돌입하게 되는 것이다.
때로는 괴로운 상황을 피하기 위해 활동 영역을 줄여 나가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는 많이 앓고 많이 아파한다.
세상에 힘든 것 중 하나가 자기의 본 모습을 만 천하에 밝히는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얼마나 질 좋고 질긴 옷을 입었는지 내 속의 모습을 나자신이 보기 힘들다.
스스로 만들어 놓은 허구가 하도 많아서 안개 낀 장충단 공원 같기도 하다. 잃어 버릴게 많기도 한지 꽁꽁 숨겨놓고 보여주지 않으려 한다.
이것은 하나의 두려움이다.
무엇을 가져야 할지도 모르면서 악착같아 지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면서 허둥댄다.
인간은 두려움의 존재이다. 어쩌면 나는 나를 바라보기 두려운지 모른다. 다 벗어버린 초라한 모습을 대면하기가 싫은 건 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이 ‘타산지석’ 이라는 말 한마디에 부서져 버렸다.
쓸데없이 입고 있는 질긴 ego의 옷이나 발라진 미끈한 관념들이 이 ‘거친 돌’ 앞에서 거친 숨을 쉬고 있었다. 어떻게 내가 이기겠는가? 나보다 더 거친 돌이라는 데.
왜 나는 이기지도 못할 상대들 앞에서 여태껏 몸부림 쳤을까? 무엇을 지키려고?
생각해 보니 거친 돌은 성스럽다.
나 스스로 벗어내지 못하는 많은 질긴 외피들을 부숴주려 온 인연들이요, 거친 언어들이요, 때론 모멸감을 일으키는 강한 칼들이라. 그런 것들을 만날 때이면 당황하고 피하고 방어 했었는데, 그게 아니지 않는가? 나의 옷을 찢어내고 두껍게 낀 때를 벗겨내고 내 고운 속살을 들어내 주기 위한 신의 선물 아닌가?
몰랐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연마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내가 보기 두려워 하는 내 속 모습을 보게 해 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벗어야 한다. 벗겨내야 한다. 이 무겁고 질긴 업의 옷을 던져 버려야 한다.
성벽이 필요 없는 자유의 성을 찾아내야 한다.
스스로 허물지 못하는 견고한 벽을 저 다른 산의 거친 돌로 쳐내야 한다.
그 거친 돌들을 감사해야 한다.
이렇게 어떤 격랑의 동요가 나를 스치고 갔던 것이다. 말 한마디에, 뜻 한 자락에 나는 나를 벗어 버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아직 나를 치고 괴롭히는 말 한마디가 있다면 아직도 그 부분이 벗겨지지 않았다는 것을, 그 부분을 깎아주러 온 손님이라는 것을 깨닫기로 한 것이다. 조금 거칠어서 기분 나쁘기도 하지만 내 옷을 벗겨 주겠다는데 ‘그래 한번 해봐라, 맞아 주마’라는 의외의 뚝심이 생긴 것이다. 지키려는 방어로부터의 생각의 변화이다. 사실, 지켜야 할 것이 없다는 것의 인식이기도 하다. 아니 그런 것들은 지키지 말아야 더 큰 자아를 밝힐 수 있음을 안 것이다.
말 한 구절의 빛이 순식간에 내 마음의 빗장을 열어 제치게 하고, 가야 할 길까지 제시하며 나를 신세계로 이끈다. 참으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어느 날, 내가 더 벗어버릴 옷이 없을 때 어떤 돌이 날아와도 별로 아프지 않을 때 과연 내 모습이 그냥 초라할지는 의문이다. 아마도 질 좋은 옷을 입고 있을 때보다 훨씬 빛이 나는 청년의 모습일 수도 있겠고 좀 더 자유로운 영혼을 만날 수도 있으리라. 나는 이 존재를 그리워 했는지 모른다. 이 존재의 모습을 밝히고 싶었는지 모른다. 구차스러운 바깥 것에 영향 받지 않는 내 안의 진짜 모습을 그리워 했는지 모른다.
내가 좋아하는 ‘바람’의 구절이 있다.
양궁도 바람이 불고 시끄러운 곳에서 일부러 훈련 시킨다고 한다. 집중력을 키우기 위해서 일 것이다. 영화 ‘최종 병기 활’ 의 마지막 대사는 나를 울린다.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극복할 뿐이다.’ 나는 여기에 하나를 더하고 싶다.
‘극복은 바람을 믿고 나를 맡기는 것이다.’ 나머지는 하늘이 한다. 바람을 믿고 정작 활을 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집중은 신의 영역이다. 잠시 인간과 신이 공유하는 방에 들어 가는 것이다.물론 그것은 내가 입은 구차한 옷들을 다 벗었을 때야 비로소 들어갈 수 있는 영역일 것이다.
갈리면서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갈리면서 빛나는 보석이 되는 것이다. 보석을 연마하는 거친 돌은 또 얼마나 금강같이 강하고 뚜렷해야 하겠는가? 그냥 부서져 버리는 돌들은 갈아 줄 돌이 따로 필요없고, 안에 보석이 들어 있는 돌은 더욱 강하고 거친 금강같은 돌이 필요한 것이다. 서로 갈리고 갈아주는 타산지석들이 되어 곳곳에서 빛나는 보석처럼 반짝이는 세상을 만들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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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영무 (치과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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