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충걸의 필동멘션 ‘읽지 않았으나 읽은’ 사람만 늘어났다
역병이 돌아 집에 있는 날들은 책 읽을 좋은 기회인데 정작 흥행한 것은 넷플릭스
▶ 그런데도 독서클럽들이 생기고 미디어에선 책 소개 프로를 편성, 책 구매량이 늘었다는 통계까지…
옷을 사듯 책을 쇼핑하고 패널들이 요약한 ‘전체의 대강’으로 책 한 권을 마스터 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문학도서관 ‘소전서림’ 안의 문학서가 모습. [소전서림 제공]
요즘 부쩍 읽을 만 한 책을 열 권 정도 추천해달라는 친구가 많아졌다. 사전과 성경 말고는 어떤 책도 들추어 보지 않은 친구조차. 백 권이 아니라는 것에 안심하면서도 마음은 조금 복잡해졌다. 책 열 권이면 그가 읽은 평생의 책 목록이 될 테니까.
먼저 다들 들어 보기나 했지 제대로 읽은 사람 하나 없는 고전을 권할까? 그러나‘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나오는 맏형이나 햄릿이 들고 있는 해골 주인의 이름이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니면 로버트 버튼의 우울감에 관한 기념비적 에세이? 중고 책방에서 산, 세로로 조판된 일본 소설? 또 아니면 시집을 권할까? 워즈워스? 백석? 그런데 요즘 누가 시를 읽는다고? 혹은 지난 세기 작가 중 가장 중요하다는 릴케? (내 말은, 유독 흥미로운 말을 많이 했다는 의미에서. 그러나 어떤 번역을 고르지?) 아인슈타인도 고개를 저을 세 권짜리 우주과학 책은 어떨까? 삽화가 거의 없으면서 고대부터 현대를 아우르는 665페이지 예술가의 초상론은? 책에 대한 일반적 대화에 끼지 않으나 동일한 규칙을 적용한 어린이 도서는? 자기개발서는 나에게 너무 취약해서 패스. 최소한 이 모든 분류를 뛰어 넘는 책이 하나 있긴 하다. 불면증을 위한 맞춤형 친구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서’.
설거지 하는 데도 무수한 연산과 법칙이 아우성치는 판국에 독서의 원칙이라고 만만할 리 없다. 결론은, 어떤 책도 그를 만족시킬 수 없다. 에드워드 기번의 수십 권짜리 ‘로마제국 쇠망사’를 권한다면 읽을까? 독서 경험도 의복 쇼핑처럼 숱한 시행 착오를 거쳐야 취향이 생긴다. 인생처럼 홀로 걸어 가야 하는 고독한 일인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독서는 나의 취미이자 특기였다. 방위로 복무할 때도 구(區) 도서관에서 뽑은 ‘그 해의 독서왕’이었다. 서가에서 오래된 책을 꺼낼 때 공기 중에 떠도는 무기질적인 냄새는 도저히 잊을 수 없다. 그 순간의 촉감과 바랜 잉크의 따뜻함도. 종이 먼지가 환등기 같은 햇살 속을 떠다니는 세상에서 가장 기묘한 장소에 와있다는 충족감은 무엇이었을까. 차 안에서조차 표지 디자인을 다친다고 옅은 카시트 색을 고집했던 선배나, 종이 감촉을 더 느끼고 싶어서 장갑을 끼지 않은 보후밀 흐라발의 소설 속 인물만큼은 아니지만, 욕조에서도 읽게 책 겉장을 코팅했던 나 역시 유난스럽기는 막상막하였다.
몇 년 전, 시력에 큰 문제가 생겨 한동안 독서는 꿈도 못 꾸다가 본격적으로 다시 읽으면서 전에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에게 침투하는 독서의 연약함을. 의자에 앉아 체중을 견디며 페이지를 넘기는 게 이렇게 신체적으로 피곤한 일이었나?
책은 성인조차 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 장애로 만들었다. 15분짜리 유튜브 영상은 지루해서 볼 수도 없고, 3분짜리 클립 영상조차 1분마다 빨리 감기 하는 인간이 책을 펼친들 스마트폰과 감자칩과 손거울을 번갈아 저글링하는 와중에 터보 엔진을 단 다리만 쉴 새 없이 떨 뿐이다.
전자책으로 갈아타도 핑계는 계속된다. 종이책은 눈은 편한데 너무 무거워. 전자책은 가독성은 괜찮은데 눈이 금방 건조해져서 못 읽겠어…. 역병이 돌아 집 안에 있어야 하는 날들은 차라리 책 읽을 기회 같았는데, 정작 흥행한 것은 넷플릭스였지. 책을 잠깐 정독하기가 이렇게 어려운데, 중고등학생일 적에는 어떻게 종일을 의자에 붙인 듯 앉아 있었을까. 거기다 스마트폰을 보지 않는 불가능한 냉정함, 어떤 것에도 눈길을 안 주는 비인간적 집중력도 갖추어야 하다니. 미래를 향해 현재를 밀어내는 시간의 흐름 위에 글자 하나하나를 뒤쫓다 행간의 의미를 알아채자 마자 단락 전체를 망각 속에 빠뜨리는 다음 장(章)의 완력은, 괴로움은 영원히 순환된다는 법칙만 일깨울 뿐이다.
게다가 몸 하나 누일 데 없는 좁은 방의 청춘에게 책은 공간을 파먹어 들어가는 사각형 포식자. 바닥에 두는 순간, 집안이 벌레 소굴이 된다는 엄포까지 더해지면 독서는커녕 책 자체가 무서워진다. 그렇다면, 주문한 커피를 기다리는 10분, 영화 상영 대기 시간 20분, 서둘러 점심을 먹고 확보한 30분을 적립해 멘소래담 냄새 풍기는 손목으로 책 맨 뒷장을 닫을 때의 기쁨을 무엇과 견줄까.
상황이 이런데도 각기 다른 성격의 독서 클럽이 경쟁적으로 생기고, 미디어의 책 소개 프로그램도 제법 편성되는 데다, 유튜브나 넷플렉스 같은 압도적 플랫폼조차 책이 갖는 희한한 영향력을 강조하고 있다니, 즐겁고도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그 와중에 기존과 다른 형태의 이종 결합 서점이 속속 들어서는 걸 보면 책은 잠재울 수 없는 스타일의 불길에 휩싸인 것만 같다. 지하철에서 다들 공모한 듯 휴대폰만 본다는 탄식이 메아리 치던 나라가 언제 이렇게 독서 강국이 되었지? 책이 준 감정을 내면화 시켜 자기만의 스토리로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나? 언제부터 책 읽는 사람의 긴 속눈썹과 소슬한 이마를 찬미하기 시작했을까?
어른들은 강조했다. 좋은 책 한 권이 인생을 바꾼다고. 책의 영혼과 친구가 되라고. 책 속에 길이 있으니 어서 인간의 심연에 가 닿으라고. 세상에, 지난 세대의 유물 같던 금언들이 아직까지 먹히다니. 책의 희열과 우수, 숭고함과 과시, 사유와 가용 지식이 여전히 유효하다니. 그런데 놀랍게도 나는 독서 모임 장소 말고는 어디에서도 책 읽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독서 인구는 줄었으나 책 구매의 총량은 늘었다는 통계는 무엇을 의미할까?
누군가는 옷을 사듯 책을 ‘쇼핑’한다고 했다. 집에 쌓아 둔 것만으로도 읽은 기분이 든다고. 연애에 대한 공상처럼 나중에 읽으리라는 각오만으로 행복해진다고. 모든 소비에는 죄의식이 따른다. 그러나 책 ‘쇼핑’의 비밀은 누구에게나 지지받는다는 것이다. 확실히 책만큼 고결한 척 세속적이며, 쓸모 없는 듯 능률적인 사물이 없다. 그러나 요리책을 보는 것만으로 배가 부르진 않는다.
한편, 킨들과 리디북스와 밀리의 서재가 읽는 방법을 새로 고안하고, 터치 몇 번으로 수 백 권을 다운로드 받으며, 디지털화된 룰의 무게를 가뿐히 받치는 세대를 전통적 도서 판매의 추이로 재단할 수 있을까? 매체의 책 관련 프로그램이 창궐하는 것도, 늘어난 독서 인구 때문이 아니라 패널들이 요약한 ‘전체의 대강’만으로 책 한 권을 마스터했다고 착각해서가 아닌가? 즉,‘읽지 않았으나 읽은’ 인간만 늘었다.(그러나 책을 사놓고 읽지 않는 사람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위선은 위악보다 나은 법이니까.)
책에서 얻는 지식은 현실과 무관하다는 심각한 사람도 많다. 물론. 책은 걱정되는 미래의 만병통치약이 될 순 없다. 그러나 모두의 기본적 평등을 믿지 않는 사람도 독서 행위의 동등함은 믿을 것이다. 최적의 상태라면, 독서는 우리의 자아가 아니라 이상을 우선시할 것이다. 기차가 사람 사이의 거리를 메우고, 편지가 마음의 빈 곳을 메우듯이 책은 그렇게 허영과 사색 사이를 메운다. 동시에 시대의 통념에 도전하도록 안내하고, 질문을 하는 인간의 조건을 일깨우며, 무미건조한 확신에 어느 정도 면역력을 길러준다. 단편적 사고를 불시에 뒤엎는 책의 다차원적 특성이야 말로 교과 과정에서 부재했던 질문들을 다시 불러올 것이다. 그러나 내가 책을 읽는 건 그런 거룩한 이유에서가 아니라 독서 말고 다른 취미가 없어서이다.
가끔 책을 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무슨 가치가 있는지 의심한다. 아무리 책을 파고 들어도 지혜의 입자 하나 매만질 수 없고, 밑줄을 그었던 어떤 문장도 우물에 빠진 나를 건지러 오지 않았다. 분명한 건 읽는 행위가 붕괴된 빅뱅 후에는 무엇으로도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종이의 안전망은 확실히 느슨해졌다. 책은 인쇄소에서 찍혀야 한다는 전통적인 미신, 전달력과 혁신성 사이의 팽팽한 긴장, 화이트나 크림색 종이로 엮인 전형적인 책은 전자책의 야망 뒤로 퇴장하리라는 선언이 오늘도 자루 속 족제비처럼 날뛴다. 그래도 책은 마지막까지 가장 위대한 문명의 산물로 남을 것이다. 연극이나 책처럼 오랜 매체는 죽지 않는다. 다만 형태가 변할 뿐.
우리는 코카콜라 병 하나로 동네가 즐거웠던 부족도 아니고, 하늘만 살피며 날씨를 점치는 고대인이 될 수도 없다. 마지막 문제는 이것이다. 온 세상이 프로그램화되어 액정 화면으로 빨려 들어가는 세상에 어디까지 독서로 규정할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장서 백만 권의 도서관을 세운다고 해도 책을 읽겠다는 능동적 절박함을 갖추지 않고는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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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걸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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