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치과의사 김경수 박사 아내 김(노)경자 씨, 1965년 유학와 커버넌트 신학대학원 기독교교육학과 졸업
▶ 췌장암 투병중에도 활발한 봉사의 삶 살아 이웃에 ‘귀감’
자신의 전공을 희생하고 한평생 남편과 자녀 뒷바라지를 하면서 치과의사 남편과 선교에도 열심이었던 김경자씨는 췌장암 투병중에도 오히려 친지들을 격려해줬다고 유가족측은 전했다.
“지난 4개월여간 췌장암으로 투병중에도 전혀 불평하거나 힘들어하지 않고 오히려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주변 사람들을 격려하기까지 했습니다”
지난 4월28일 별세한 김(노)경자(80·사진)씨의 남편인 치과의사 김경수박사는 “아내가 지금도 살아 돌아 올 것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무척 보고 싶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김경자씨는 1941년 1월5일 서울시 종로구에서 부친 노덕상 집사와 모친 최덕행 집사의 4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69년 김경수씨와 LA에서 결혼해 슬하에 장녀 애리, 차녀 릴리와 1명의 외손녀 그레이스를 두었다.
김씨는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주안에 있는 나에게’ 등 찬송을 듣고 자랐다. 초등학교 2학년 시절 6.25전쟁통에 부산에서 아버지가 48세의 나이에 뇌졸증으로 돌아가시고 45세의 어머니는 청상과부가 되어 이들 자녀들을 믿음과 사랑으로 키웠다고 한다.
이화여중을 거쳐 1960년 이화여고를 졸업한 김씨는 1963년 이화여대 가정학과를 졸업했다. 1965년 유학생으로 도미해 커버넌트 신학대학원 기독교교육학과를 1968년에 졸업후 아주사 퍼시픽 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김경자씨는 1962년 대학재학 시절부터 기독교 학생단체 CCC 활동을 하면서 서울 치대에 재학중이던 남편 김경수씨를 만나 줄곳 연애를 하다가 남편이 치대 졸업후 군복무를 마치고 미국에 건너와 1969년 9월1일 LA에서 화촉을 밝혔다.
결혼 전인 1968년 김경자씨가 미국에서 유학중인 가운데 양가 부모들과 김경수씨만 서울에서 약혼식을 치를 정도로 양가 집안이 두 사람을 신뢰했다.
1969년 LA에 신혼살림을 차리자 마자 김경자씨는 본격적으로 생업전선에 나서 USC치대에 다니는 남편의 학비를 벌어야 했다. 김경자씨는 유창한 영어 실력을 인정받아 미 주류은행 시큐리티 퍼시픽내셔널 뱅크에서 그 당시 4만달러 이상의 고액구좌를 관리하는 스페셜리스트로 근무했다. 당시 월급은 500달러 수준이었다고 한다.
남편이 1973년 USC 치대를 졸업하고 개업할 때까지 김경자씨는 본인의 전공을 살리지 못하고 남편의 공부를 뒷바라지 하기위해 은행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김경자씨는 1993년부터 나성열린문교회에서 권사로 임직해왔다.
김경수씨도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50여년이 넘게 치과의사로 일하면서 늘 치과선교를 많이 다녔는 데 아내도 이에 동참해줘서 항상 고마웠다고 회고했다. 특히 김씨는 “김경수씨의 안 사람이 된 것 이상 나는 더 바랄 것이 없다는 아내의 말이 큰 힘이 되었다”며 “평생 자신의 전공과 재능을 희생해가면서 남편을 내조하고 격려해준 아내가 아직도 너무 고맙다”고 말했다.
이렇게 극진히 남편을 섬기는 아내였는데도 불구하고 장모님의 눈에는 성이 차지 않았는지 지난 1996년에 돌아가신 장모님 최덕행 집사가 한 번은 아내를 불러놓고 “경자야, 너는 남편에게 복종해라, 이것이 내 말이 아니고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란다”면서 타이를 때 김경수씨는 장모님에게 더할 나위 없는 감동을 받았다고 전했다.
췌장암 진단을 받고 투병중 일때도 교회의 젊은이들을 불러다가 크리스마스 파티를 해줄 정도로 봉사심이 강했던 김경자씨는 병원에서 8주간, 집에서 3주간 지내다가 지난달 28일 평온하게 숨을 거두면서 “예수님 때문에 참으로 풍성하고 복된 삶을 살았다”고 말했다고 한다.
50년을 넘게 평생을 치과의사로 일하다 아내가 숨을 거둔 지난 4월 은퇴한 김씨는 “50여년 결혼생활을 하는 가운데 남편 섬기는 일을 최고의 덕목이자 의무로 알고 살았던 아내가 이젠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 아직도 믿겨지지 않지만 예수님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천국에서 아내를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오늘도 힘차고 살고 있다”고 밝게 웃었다.
조사 - 장녀 애리씨My mother was an amazing woman. She was kind, loving , giving , thoughtful and thought about others first before herself.
Her life was dedicated to God and our family, to my father to whom she was married to for over 50 years, to my sister and I who even though we were grown adults would constantly worry about and make sure we were eating right. She would always pray for us and I so appreciated it.
She could never sit down. She was always on the move. She always had to make sure that everyone else was taken care of first. That was my mom.
Our telephone calls always ended with “I love you”
I have saved her voice mails over the past 3 years and I have listened to them throughout the past days and all of them ended with her saying “ I love you”
Even when she was sick, she always proclaimed her love to us. When I told her I made dinner for dad, she said oh thank you.
She loved my dad so much. She was my best friend, my confidant, but most of all, she was my mom and I miss her so much.
She encouraged us to love the Lord , worship the Lord and read the Bible as she was a beautiful woman of God and her words are still in my mind.
It is hard to imagine life without her but to know she is in heaven brings me great joy and peace.
I love you alway mom!
<
박흥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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