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한수 빅터밸리 상의 회장 부친 김종태 장로
▶ 남북적십자회담 공로 대통령 훈장, 수원·인천 중정지부장
미국 아들집 방문했다 코로나19로 제대로 치료 못받고 영면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살기위해 미국을 방문했다가 지병이 악화되어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하고 숨진 김종태 장로는 “원리원칙을 고수하는 가운데 공무원의 청렴결백에 목숨을 거는 삶을 살았다”고 유족들은 회고했다. 2015년 제주도 여행에서 가족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저에게 아버지는 늘 자랑스런 국가와도 같은 분이었습니다. 육군 특무대 출신으로 국가 정보기관에서 쭉 근무하셨던 아버지의 애국심은 대단하셨습니다” 지난 4월20일 87세의 나이에 별세한 김종태(사진)씨의 아들 김한수 빅터밸리 한인상공회의소 회장(외대 LA글로벌 CEO 1기)은 “부친은 원리원칙을 고수하셨고, 공무원의 청렴결백에 목숨을 거는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김종태씨는 지난 1933년 10월21일 경기도 수원에서 부친 김용배씨와 모친 김정순씨의 1남1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미동초등학교, 경기중·고등학교, 연세대학교 화공학부를 졸업했다.
1946년 1월12일 전영란씨와 결혼해 장남 한수, 장녀 현주, 2명의 손자, 2명의 손녀를 두었다.
김종태씨의 부친 김용배씨는 일본 동지사(교토) 대학교를 유학하고 한국에 돌아와 새로운 사업을 벌였던 사업가였다. 수원백화점, 수원극장을 세우고 영화사를 만들어 영화 ‘포리호의 반란(황해 주연)’을 제작하는 등 다양한 사업을 운영했다. 럭키빵 제빵공장도 세워 당시 인기좋은 럭키크림빵을 경기도 지역에 공급했고, ‘삼화상사’를 설립해 글러브, 배트 등 순수 국산 야구용품을 제작 판매했다. 또한 한국야구인 연맹 초대회원 및 수원상공회의소 회장을 역임했다.
김종태씨는 사업을 하는 아버지 아래서 유복한 생활을 했지만 6.25전쟁과 부친의 무리한 사업확장과 실패로 일찌감치 생업전선에 뛰어들어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6.25전쟁당시 부산 임시 연세대학교에 재학시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달러화를 교환하는 일도 했다. 김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대연금속 병뚜껑 제조 공장을 4년간 운영하다가 1961년 중앙정보부에 입사했다.
김한수 빅터밸리 한인상공회의소 회장은 “부친은 1960년대 공무원 월급 1만5,000원을 받아 노란 월급봉투에 담아 오시는 날은 영락없이 거하게 취하셔서 가파른 세검정 언덕길을 오르셨다”며 “부친은 집으로 들어오는 일체의 선물을 거절하셨고 바쁜 일정 때문에 요즘 아이들처럼 아버지와의 즐거운 나들이 추억은 많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김종태씨는 바쁜 와중에도 가족들과 가끔 시간을 보내곤 했다. 한 번은 을왕리 섬으로 김씨 가족과 친구 가족이 함께 휴가를 갔는데 그해 몰아닥친 여름 폭풍으로 배가 끊어져 3~4일 섬에 발이 묶인 적이 있었다. 김한수씨는 “부친의 상황설명을 듣고 중정에서 아버지를 수송하기위해 폭풍을 뚫고 쾌속선을 보내 인천항으로 무사히 돌아오면서 아버지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중앙정보부 재직시절 1970년대 남북적십자회담 남측요원으로 대표단에 소속되어 대통령 훈장을 받았고, 수원·인천 지부장을 지냈다.
김씨는 30년 가까운 공직생활을 정리하고 같은 고향 선배였던 선경 최종현 회장의 권유로 1987년 선경그룹 경영기획실 상무이사 자리로 옮겨 6년간 재직하면서 공무원에서 기업인으로 제 2의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그후에는 STI Bio대표이사로 3년을 재직했다. 1983년부터 여의도 순복음교회에 출석해 1988년 강남성전 집사로 임명됐으며 2014년 원당순복음교회 장로로 임직했다. 김한수씨는 “부친이 공무원이나 기업임원으로 재직시 부하직원들의 크고 작은 대소사와 경조사까지도 챙기는 등 가족같이 돌봐 주셨다”며 “퇴직 후에도 매년 아버지를 찾아오는 분도 계셨다”고 말했다.
김씨는 외아들이 도미한 1997년 9월 이후 매년 부부동반으로 미국 아들집을 방문했다. 아들이 사는 LA 한인타운 아파트에서 손주들을 돌보며 4~5개월을 머물렀다.
김한수씨는 “부친이 반드시 하나님께서 너를 성공하게 만들어 주신다”며 “지금 어렵다고 기죽지말고 힘내라”고 말씀하시고 “아들 부부가 이제나 자리잡으려나? 내년엔 자리잡을 수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늘 기도해주셨다”고 회고했다.
김씨는 아들이 미국으로 떠난 지 23년만에 지난 2월1일 부인과 함께 미국을 방문해 영주권 신청을 할 계획이었다. 지난 2월은 한국이 코로나 19의 확산으로 어려움을 겪을 시기였다.
그러나 3월에 접어들면서 이번에는 미국이 더 심각해잔 코로나 19사태로 셧다운 명령이 내려져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김씨는 지병이었던 심부전이 걱정되었지만 서울에서 가져온 약으로 버텼다. 김씨는 그러나 미미하던 천식증상이 갑작스레 악화되면서 한국으로 조기귀국해서 일단 병원에 갔다가 다시 미국에 돌아와서 영주권 신청을 하기위해 귀국일자 예약을 변경했다. 호흡곤란이 갑자기 심해진 지난 4월18일에는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이 격심했다. 19일에는 온라인예배를 드리려고 휠체어에 힘겹게 앉았지만 호흡이 곤란해져 애플밸리시의 세인트 매리 메디칼 센터로 옮겨졌다가 20일 새벽 3시44분 끝내 영면했다.
김한수씨는 “부친이 나에게 큰 것을 바라지 않으셨으며 언제나 자랑스런 아들이 되어 달라고 하셨고 정직하게 살아달라고 당부하셨다”며 “코로나19로 열악해진 미국의 의료시스템으로 제대로 이곳에서 치료를 받지 못하고 한국에 서둘러 가시려다가 돌아가신 것이 못내 안타깝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또한 “부친이 가장 행복했던 때는 LA공항에 마중나온 아들 얼굴을 보실 때였다”며 “건강하고 행복하게 무탈하게만 살아주면 그 얼굴만 봐도 행복하고 뭐든 다 해주고 싶은 아들에게 품은 아버지의 소망은 만남과 동행”이었다고 말했다.
조사 - 아들 김한수 빅터밸리 한인상의 회장아버지는 저를 너무도 사랑하셨습니다. 아들도 모르게 너무나 오랫동안 짝사랑을 하셨어요.
아버지 너무 보고싶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셨다면 이젠 정말로 아버지와 늘 함께 하고 싶었는데, 더 잘해드리고 싶었는데 아쉽습니다.
아버지는 당신이 괴로운 중에도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 까지도 아들에 대한 염려의 끈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날 마지막 순간, 아들의 품에서 영면하셨지요. 축 늘어진 아버지를 휠체어에서 내려드리고, 바닥에서 행한 심폐소생술도, 병원 앰블런스 전화도, 한 사람만 허락되던 병원에서의 임종순간의 재회도, 모두 이 못난 아들에게 시켜주셨습니다. 아버지의 유골함을 받아오는 일도 장례식장을 잡는 일도, 묘지를 정하는 일도 모두 이 아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아버지는 너무도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영정사진속에 웃고 계셨지만 아들은 아쉬움과 죄책감에 가슴속깊이 피눈물이 흘러 나왔습니다. 아버지가 보여주셨던 가족사랑과 자랑스런 훌륭한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이어받아 아버지가 걸으신 길을 따라가겠습니다.
아버지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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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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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총 4건의 의견이 있습니다.
중정이 온갖 만행을 저지르던 시절 대학을 다닌 사람으로서 "청렴결백"은 모르겠지만 아래 글 쓰신 분들 의견처럼 나머지는 동의할 수가 없네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만 이런 가정사까지 기사화하는 '한국일보'가 좀 한심스럽기도 하고요.
가족이야 그렇게 평가하는 거고 고인의 객관적 평가는 다르죠. 중정에서 30년 했던 나쁜 짓들로 수많은 사람들이 받았을 고통은 고인이 지옥에서 벗어나길 힘들다고 확신합니다. 지옥에서 꼭 반성하길...
그당시 중정에서 일한건 자랑할일이 아니죠 얼마나 많은사람이 끌려가서 간접 으로 몰아서 많은사람 가정에 고통을 줬는지 한국사람이면 다아는사실 이런걸 이런데올릴 만한내용은아니죠 자기가족이라도 냉정하게 생각할수있는 룸이있으면 하네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