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양탈환전투서 30분차이로 김일성 체포기회 놓쳐
▶ 서귀포 해안간첩선 격침작전성공으로 충무무공훈장
“부친은 한 평생 청렴결백한 군인의 길을 걸으셨고 저희에게도 항상 정직하게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1월8일 향년 96세의 나이에 타계한 오윤영(사진) 전 장군의 장녀 오명애씨는“아버님이 대한민국 군인으로서 6.25전쟁과 간첩토벌작전, 월남전 등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오윤영씨는 1923년 9월20일(음력) 부친 오영훈씨와 모친 백은찬씨의 2녀1남중 막내 아들로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오씨가 2세때 별세했고 홀어머니와, 외할머니, 누나 등과 생활하면서 평양시 상수리 300번지로 5세때 이주했다. 집안은 부유했으며 황해도 곡산 인근(일명 정방산)에 12만평의 논과 밭을 소유하고 있었다.
오씨는 초등학교(당시 소학교) 3학년 때부터 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했으며 수영, 기계체조로 체력을 단련했다. 모친은 14세 때 별세했고 이후 외가친척들과 함께 성장하게 되었다.
평양 숭인상업학교, 대동공전 광산과를 졸업하고 공산당에 대항하는 조만식 선생의 결사조직 ‘서북청년회’에서 활동하다 1946년 2월, 20세 때 월남했다. 이후 대한민국 육사에 입교하기 전에 경기도 경찰간부학교 시험에 합격해 종로 경찰서에 근무하던 중 평양 정의 여고출신의 노근애씨와 1949년 서울에서 결혼했다.
그는 대한민국 정부수립전 미 군정하에서 군 경력 또는 유사한 경력의 소유자를 대상으로 한 군 간부확대편성계획에 따라 육사8기 특별2반에 지원, 소정의 교육을 이수한후 소위로 임관했다. 오씨는 1949년1월 입대해 1사단 정보처 보좌관(대위)으로 복무중 6.25를 맞았다. 서울 수복 후 평양에 제일 먼저 입성한 전과로 소령으로 특진한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당시 대령)과 작전부에서 근무했다.
평생 청렴결백한 군인의 길을 걸었던 고 오윤영 장군은 자녀들에게도 항상 정직하게 살라고 이야기하면서 끊임없는 조국사랑을 자손들에게 가르쳤다. 지난해 외손자 로렌스 박 LAPD 서전트 승진행사에 자리를 함께 했다.
이화여대 남가주동문회장(2010~2011년)을 역임한 장녀 오명애씨는 “아버지가 지휘관으로 참여한 평양탈환전투에서 30분만 일찍 도착했어도 김일성 주석을 체포할 기회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아버지의 실제 전투를 소재로 한 ‘30분’이라는 단편영화 제작을 현재 추진중”이라고 말했다.
1968년 1월21일 북한 124군부대 무장 게릴라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하기 위해 서울에 침투한 사건이 발생하자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국가안보의 위기속에 당시 육본 군수참모부 기획과장이던 오씨에게 서귀포 해안간첩선 격침작전을 명령하게 된다. 그는 합참대간첩작전본부 작전과장으로 서귀포 해안간첩선 격침작전을 마치고 각군총장 배석하에 박정희 대통령에게 작전이 성공하게 된 경과를 보고하게 됐다. 이로 인해 충무무공훈장을 받고 1969년 장성으로 진급한다. 이어서 1971년 월남전의 맹호 16호 작전에 부사단장으로 참여해 월맹 정규군 2연대, 12연대 병력일부를 섬멸하는 전공을 올려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
1972년부터 75년까지 39사단 사단장으로 재임하다가 77년 1월31일 준장으로 전역했다.
지난 2월 고 오윤영 장군의 유해가 부인의 유해와 함께 한국의 대전 현충원 묘지에 안장됐다.
그리고 군복무시절 서울대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 과정을 수료했다.
오씨는 군인으로 숱한 전투현장에서 세운 혁혁한 공로로 충무무공훈장 2회, 화랑 무공훈장 보국훈장 각 1회, 월남 은성훈장 및 미국 근무유공훈장 각 1회 등 16개의 훈장과 표창장을 수여받았다.
군에서 전역 후 1984년 장녀의 초청으로 부인 노근애씨와 함께 도미한 오씨는 잠시 무역 비즈니스를 운영하다가 접고 전역장군들의 모임인 성우회장 등을 지내기도 했다.
오명애씨는 “아버님의 딸 사랑이 대단해 한국에 계셔도 되는 데, 자신의 초청으로 미국에 왔다”며 “94세까지 운전을 하고 다니실 정도로 건강했다”고 말했다. 2014년 부인을 먼저 여읜 오씨는 이후에도 최근까지 건강한 생활을 해왔다.
오씨는 지난 2010년 한국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서도 “공산당의 행위에 대해서 잊어서는 안 되고 개인이나 나라가 힘없고 실력이 없으면 무너진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퇴역 후 미국으로 건너와서도 오씨는 지난 36년간 그동안 먼 곳에서 조국을 직접 도울 수는 없었지만 간접적으로 또는 마음으로 항상 한국을 ‘지원’하면서 한국전의 교훈을 틈만 있으면 가족과 친지 이웃들에게 전해 왔다.
오씨의 유족으로 장녀 명애, 장남 호근, 차남 병근, 삼남 성근 등 3남1녀와 4명의 손자, 4명의 손녀, 증손자 5명, 증손녀 3명 등을 두고 있다. 특히 오씨의 큰외손자 박재영(로렌스 박)씨는 지난 2006년 11월 LAPD 경관으로 임관해 현재 퍼시픽 경찰서의 서전트로 근무하고 있다. 오씨는 당시 외손자의 임관식에 참석해 본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로렌스가 어릴 때 내 권총을 차고 다니며 재롱을 떨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사회에 봉사하는 당당한 경찰관이 된 것을 보니 너무나 대견하다”고 밝혔다.
오명애씨는 “6.25발발 70주년을 몇 달 앞두고 돌아가신 아버님의 지금이라도 조국이 부르면 공산주의자들과 싸울 준비가 되어있다고 말씀 하신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회고했다.
오윤영 장군의 유해는 지난 66년간 희로애락을 같이 한 부인 노근애씨의 유해와 함께 지난 2월1일 한국의 대전 현충원 묘지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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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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