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던 전 세계의 음악계가 코로나 바이러스 한 방에 조용히 침묵하고 있다. 과연 베토벤다운 생일축포이며 기념 파티가 아닐 수 없다. 가볍게 왔다가 그냥 사라질 베토벤이 아니다. 그의 전 생애가 그랬듯, 어딘가 일그러진 운명의 전주곡, 한 불행한 사나이의 절규… 그랬기 때문에 또 초월적이고 절대음악으로 감동을 주었던 악성…. 시인 릴케는 “오직 자신의 내부의 소리를 들으라고 신이 일부러 귀를 막아버린 자”라고 했다. 쇼펜하우워는 “그의 음악은 뭇사람의 영혼을 미역감게 만든다”고 했다. 말러는 “서구 음악은 오직 베토벤과 바그너가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면 베토벤이 살아 있다면 스스로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사람들은 베토벤이 후대에 영원히 기억되는 음악가, 한 위인으로 남길 바랬을 것으로 믿을지 모르지만 사실 베토벤은 매우 외롭고 소심한 사람이었다고한다. 괴테는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을 듣고 “마구 무너져 내리는 것 같군”이라 했다지만 사실 베토벤은 언제나 모든 것을 부셔버리고 파괴하는 존재, 반항하고 절규하는 존재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베토벤의 로망스 F장조, 바이올린 협주곡, 전원 교향곡 등을 듣고 있으면 베토벤의 일그러진 모습이나 반항, 절규 등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아니 오히려 우리들과 별 다름없는, 그저 함께 길을 걷고 싶은 대상… 자신의 음악을 특별한 계열에 올려 놓기 보다는 일상에서 이해받고 즐기길 바라는 매우 평범한 베토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베토벤을 즐긴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매우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또 성격상 ‘즐긴다’는 표현은 베토벤에게는 결코 어울리는 단어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그너는 베토벤의 교향곡 7번을 가리켜 무도의 화신, 혹자는 술취한 자의 음악이라했다. 베토벤 스스로도 자신을 인류를 위해 술을 빚는 ‘바커스’로 비유한 바 있다. 즉 어떤 거창한 단어로 감동을 표현하거나 비평가에게 평가받기 위한 그런 피상적이고 딱딱한 예술이 아니라 그저 주거니 받거니 한 잔 술의 흥취로 시상을 돋구는, 그러한 예술이 또한 베토벤의 예술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토벤을 대함에 있어 우리는 지나치게 딱딱한 모습으로 주눅들 필요는 없을지 모르겠다. 베토벤도 사람이었고 또 그가 남긴 모든 작품이 항상 위대한 것만은 결코 아니었다. 그의 음악에도 모자람이 있었고 허점이 있었다. 그의 음악을 있는 그대로, 재미 없으면 재미 없는 대로, 이해 할 수 없으면 이해 할 수 없는 대로, 때로는 비판하고 때로는 피하고, 때로는 감동하면서 오솔길을 함께 걷는 그런 자세가 그가 남긴 유산을 향유하는, 진정한 동반자의 모습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아무튼 탄생 250주년이라고 하여 그를 기념하기 위해 음악회장을 찾거나 세미나에 열을 올릴 필요는 없을지 모르겠다. 그의 음악세계를 파헤쳐 가며 그 위대성을 조명하고 그 의의를 되새기고 음미하는 시간을 보낼 필요도 없을지 모르겠다. 그저 가끔, 요즘처럼 병마의 신음이 소용돌이치고, 개인적인 아픔, 운명이 우리들의 숨통을 조여올 때 그저 놀란 토끼처럼 그의 음악을 돌아보며 가슴 두근거리는 용기를 북돋움 받을 필요는 있을지 모르겠다. 하이든은 그의교향곡 3번(영웅)이 발표될 때 “이제 세상은 더 이상 예전의 음악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가 있었기에 세상은 좀 더 자유로운 음악적 이상을 펼쳐 보일 수 있었으며 그가 있었기에 슈베르트, 바그너, 브람스, 말러 등 음악의 감동이 더 멀리 메아리 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베토벤을 아는 것은 서구음악의 전반을 아는 것이며 또 바하, 헨델 등 바로크 예술로 들어가는 통로이기도 하다.
Keeping Score 를 제작한 MTT(마이클 틸슨 토마스)는 베토벤의 교향곡 3번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30년이 걸렸다고 고백한 바 있다. 브람스는 베토벤에 필적할 만한 교향곡을 만들기 위해 무려 20여년이 넘는 세월을 허비했으며 많은 연주가들이 베토벤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평생을 소진하기도 한다. 베토벤을 안다는 것은 쉬우면서도 어려운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베토벤은 그 어떤 거창한, 그 무엇을 위해 음악을 했던 것만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그 어떤 목적이나 음악가들의 생계를 위해 존재하는 베토벤도 아니다. 오히려 크건 적건간에 베토벤이야말로 각자 마음 속에 존재하는, 자기만의 감동, 자기만의 길을 함께 걷기 위해 존재하는 베토벤일 뿐이라는 것이다. 음악의 존재 목적이란 그저 숨막히는 인생의 긴 터널을, 유쾌한 팡파르 속에 훌훌 털어 버리고 비애의 맑은 공기, 폭풍우 뒤의 또다른 삶의 페이소스를 제공 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면 베토벤을 즐길 수 있을까? 이것이야말로 어쩌면 팬데믹 시대에, 어두운 운명을 배경에 깔고 베토벤이 우리에게 말하고자하는, 운명적 질문 같은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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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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