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 않아도 뒤숭숭한 요즈음, 홀로 마음을 달래려 <남한산성>이란 영화를 보게되었다. 정묘호란 9년 후, 그 사이 세력을 다진 청나라가 종전의 형제관계에서 이제는 군신관계를 요구하며 조선을 침략하게 된다. 이에 무력한 조선의 인조가 굴욕적인 삼전도의 항복을 하기까지, 병자년 그 눈 내리는 겨울, 바로 남한산성에서의 47일간을 영화는 숨 막히는 극적 대비로 그려내고 있었다
도와줄 수 없는 명나라에 목 메지 말고 새로이 떠오르는 청과의 관계를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종묘와 사직을 위하여 굴신할 것을 주장하는 실용적 주화론의 최명길, 이와 반대로 명나라와의 관계와 대의명분을 위해 비록 죽더라도 결연히 맞서 싸울것을 주장하는 주전론의 김상헌 앞에서 인조는 그저 무력하기 짝이 없다.
먼저 김상헌이 일갈한다. 전하! 명길의 말대로라면 삶이 어찌 구걸로 얻어지겠습니까. 설사 그리하여 얻어진 목숨이 있다한들 그 무슨 소용이겠으며 역사는 한결같이 그 욕됨을 기록하였으니, 정녕 오랑캐의 발밑에서 목숨을 구걸하렵니까? 사대부란 무릇 목숨을 잃을지언정 욕을 뵈어서는 아니된다 하였습니다. 하물며 사대부의 길이 그럴지언데 조정과 일국에 이르러서야 말하여 무엇 하겠나이까. 부디 사직을 위해 죽는 것이 신의 뜻이오니, 필경 신이 죽을 곳이 있다면 오랑캐의 품은 아닐 것이니 전하! 이 자리에서 저를 베소서!
이에 명길이 받아친다. 상헌의 말은 지극히 의로우나 그것은 단지 말에 그치는 일이옵니다. 상헌은 지금 살 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죽음을 입에 담고 있으며 뜻이 지나쳐 삶을 너무 가벼이 여기고 있나이다. 화친을 일컫어 구걸이라지만 그것 또한 새로운 길일 따름이옵니다. 위로는 종묘사직과 아래로는 백성이라는 다스림의 정점을 구현하려는데 그걸 그 누가 구걸이라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일단 목숨이 붙어 있어야 대의도 있고 명분이 있을 터, 사직을 파하고 백성이 없는 곳에 대의와 명분만 홀로 서면 그 무슨 소용이오리까? 훗날을 위해 한신장군도 불량배의 가랑이 밑을 기어나왔고 해와 달도 한 때 구름에 가리는 법, 죽음은 극복할 수 없으나 치욕은 잊혀지고 또 망각되어지는 것입니다. 신이 훗날 매국의 누명을 뒤집어 쓰고 죽어가더라도 오늘은 신의 말을 소홀치 마소서. 전하!
같은 상황을 두고 어쩜 이리도 다를 수 있으랴! 그들이 속한 국가를 위해 참으로 전혀 다른 방식과 순혈의 진정성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송파나루에서 임금의 피난길을 도왔던 노인이 김상헌을 안내하는 장면도 인상깊다. 상헌이 어찌 백성이 되어 하루는 제임금과 조정을 위해 강길을 안내하고 또 다음날엔 그들을 쫒는 오랑캐를 위해 강길을 여느냐고 묻자 물음은 처연한 대답이 되어 돌아온다. 전날 임금과 조정대신에게 길을 안내 하고도 좁쌀 한 줌 얻지 못했음을 그리하여 노인과 어린 손녀의 생계는 이제 오랑캐의 손에 달려있다는 그의 솔직한 토로가 이윽고 그 죽음의 빌미가 된다. 아름답게 눈내리는 강심에서 상헌은 그 노인을 한 칼에 베어버린다.
죽은 노인의 손녀딸과 김상헌이 마주하여 선문답같은 대화를 하게되는데 그 장면도 선연한 감각으로 원작자인 김훈의 필체가 돋보인다. 할아버지의 죽음을 모르고 돌아올 할아버지를 그리며 어린 소녀가 눈내린 바닥에 물고기 그림을 그리고 있다. 납덩이 같은 죄책감 속에 김상헌이 묻는다. 물고기더냐? 네, 꺽치라 하옵니다. 할아버지가 전에 잡아주던… 그래, 그 꺽치는 언제 잡을 수 있더냐? 민들레가 피면 강물이 풀리고 그리하면 꺽치가 올라옵니다… 무심히 주고 받는 그들의 대화가 까닭 모르게 가슴 시리고 아팠다.
세상의 섭리로 극과 극은 통한다 들었다. 이르고 도달하는 방법이 하도 달라서 그렇지 어쩌면 그들은 같은 것을 뜻함인지 모르겠다. 지난 총선에서도 동일한 사안을 놓고 해석하고 예견하며 통찰하는데 달라도 너무 달라 도대체 그 대목을 어떻게 그리 읽을 수 있는지 진실로 우리는 의아해한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해결책으로 정계와 학계의 이견 역시 진단은 같은데 서로의 처방은 너무 달랐다. 철저한 격리와 차단만이 살길이라 하는 편과 언제까지 그럴 수만은 없으니 그로 파생되는 세계적 실업과 경제파탄등 그 사회적 비용이 너무 커 주객 전도의 도가 지나쳤으므로 이제는 서서히 집단면역체제로 접어들어야 바이러스를 막을 수 있다는 학설도 엄연히 존재했다. 이른바 빈대 잡으려 초가삼간을 불태울 수는 없다는 학계의 매운 지적이 그러했다.
그 온당을 따질 혜안은 내겐 없지만 세상에는 무엇을 주장하는 자들의 숫자만큼 또 그것을 거스르는 그만한 크기의 사람들이 있어 어릴적 홍역처럼, 꼭 치루고 겪어야 하는 일도 반드시 있는 것 같다. 아침에 보니 담장 너머 소담한 목련이 그 커다란 망울 가득한 꽃잎을 그새 떨구었나보다… 그러기로 우리 어찌 바람을 탓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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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혜 / 부동산인,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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