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같은 세상이었다. 아무도 그 무엇을 가리키지 않았다. 어느 쪽을 쳐다봐야 할지 몰라서 많이 방황했었다.
‘운무는 보이는 사람한테만 보인데요.’ 한국을 여행할 때, 어느 한옥마을 문학관의 자원봉사자 분의 말이었다. ‘그런가?’ 미소를 띄어 본 적이 있다.
구릉이 있는 논밭 사이로 아침 안개가 피어 오르는 기가 막힌 무릉도원같은 곳이 서울 어디엔가 있었는데 도무지 그곳이 어디였는지 기억이 안 난다. 그곳을 찾고 있다는 나의 말에 그분이 친절하게 답해준 말이다.
우리는 인생길에 많은 수수께끼를 안고 살고 있다. 알게 모르게 의문의 연속 속에서 오늘 밤도 그냥 잠을 이루어야 하는 날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랑하던 사람들끼리도 헤어질 땐 저마다의 의문과 미련 속에아쉬움을 가지고 평생을 견디며 산다. 몰라서 안타깝긴 하지만, 또 밝히지 않아야 될 것들이 이 세상엔 많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적당히 모르고 적당히 잊어가면서 사는 것이 순리일지 모른다. 그래도 끊이지 않는 어떤 목마름이 있다면 우리가 무언가 찾고 있고 우리의 생명과 본능이 원하는 것이 어디엔가 있다는 얘기도 되지 않을까?
몇년 전, 평소 알고 지내는 ‘K’목사님의 번역서 ‘센터링 침묵기도’ 라는책을 읽은 적이 있다. 수도회 사제이신 ‘토마스 키팅’ 의 저서이자 관상기도 입문서이다. 거기 앞부분에, ‘순수한 믿음이란 영혼에 비치는 한 가닥 어두움의 광선이다.’ 라는 구절이 나온다. 어두움의 광선? 이게 무슨 말일까? 흰 빛으로, 하얀 옷으로 표현되는 것은 많이 보아 왔지만 어두움의 광선이라니(A Ray of Darkness). 그날부터 화두가 되어 내 마음속에 남아 있게 되었다.
어둠이 무었일까?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썼을까? 빛인데 어둠의 빛이라, 믿음이 깊어지면 그런 경지가 있는 것일까? 끊이지 않는 의구심과 호기심이 나를 감싸 안았다. 하긴, 그 책에서도 이 ‘영혼의 어두운 밤’을 경험한 수도사들이 5% 미만일 것이라고 말하고는 있다. 그러니 새로운 차원의 은혜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그 꽉 막힌 어둠으로부터의 구원을 뜻하는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니,그 어둠은 그냥 어슴프레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까만 어둠이어야 했다.
그 어두움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빛을 인지하지못하는 그런 어둠이어야 했다. 그래,그 순간 어둠과 빛이 둘이 아니라 하나로 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게 되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어둠의 밑바닥을 스치고 지나가며 가슴속으로 통곡을 했을까?
그 참담한 나락에서 어둠을 뚫고 나오는 빛을 인지하게 됐을 때의 감격은 또한 어땠을까? 이런 생각들이 들게 되었다. 평생을 수도원에서 수도하는 수도사들도 쉽게 얻지 못하는 ‘영혼의 어두운 밤’ 이라면, 오히려 이 질곡의 세속에서 많은 것과 부딪치며 사는 세상 사람들에게 필요한 은혜의 강일 수도 있으리라.
우리 인간은 각자 다르다.처지가 다르고 환경이 다르고 성격과 능력이 다르다.
나날의 인생사에서 불통의 불협화음이나 부딛히는 갖은 시련으로 인해 신음하는 영혼은 또 얼마나 많겠는지. 그러나 인고의 세월이 흘러 어느 한 순간 반짝하며 서로 통하는 미소를 발견하게 될 수도 있겠고,또 지내온 어두웠던 날의 깊이로 훗날의 햇살같은 빛을 감내할 자격과 힘을 기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찌 보면 우리 모두 경계에 서 있다. 삶의 경계에는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있다. 그만큼 존재와 존재가 마주하고있는 경계는 삼엄하기 그지없고, 영역이 다른 경계를 지나갈 때에는 그만한 수고와 인내라는 댓가를 치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영혼에도 건너야 할 경계가 있다면, 그것이 아마 이 까만 어둠일 수 있겠다. 그 막막한 까만 어둠 속에서 마지막 가진 희망이라는 지푸라기를 허공에 휘저을 때, 없는 빛이라도 만들 기세가 아닌가?
어둠이 만들어 놓은 길 위에 정교한 빛의 길이 깔리는 광경은 장관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어둠과 빛이 통할 수 있음은 우리에게 커다란 가능성과 위안을 준다. 오히려 어둠을 기대하게 되고어둠속에서의 불안과 기다림을 견디며 더 큰 구원의 빛을 꿈 꾸어 보는 것이다. 수많은 성인들이 갔던 길도 그리 많이 다를 것 같지 않다. 그들이 본 어둠은 빛의 길을 만드는 어둠이었고 그후 수많은 인류의 등불이 된 어둠이었다.
나다니엘 호손의 ‘큰바위 얼굴’ 이라는 단편이 생각난다. 나의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느 마을의 근처 산에는 큰 바위가 있는데 멀리서 보면 사람 얼굴의 모습이다. 그 마을의 출신이 언젠가는 그 얼굴의 큰 인물이 되어 돌아올 거라는 전설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자라는 한 소년의 오랜 기다림을 글은 그리고 있다.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여러 명의 인물들이 실망을 주고 지나 가고,이제는 늙어버린 이 소년의 모습이 바로 석양빛에 비치는 큰바위 얼굴과 겹쳐 보이는 감격의 순간이 오게 된다.
우리 모두 서로에게 큰바위 얼굴이 되어줬으면 좋겠다. 기다림의시간을 응원해 주고 어느 황혼의 시간에 서로의 얼굴과 얼굴이 겹쳐지는 기적이 일어나지 말란 법이 있겠는가? 영혼은 그런 것이다.길이 있고 스승이 있고 갈망이 있다.그리고 빛의 실루엣을 밝혀 줄 찬란한 어둠의 경계가 있는 것이다.
이 글을 통해 밝히는 나의 어둠에 대한 이해가 많이 외람되지 않기를 바라며 그 어둠의 강을 건너 영혼의 불빛을 본 많은 선인들께 존경의 마음을 올리고 현재 이런 어둠 안에서 온 힘을 다하고 계시는 분들이 있다면 부디 그 어둠이 주는 소망과 믿음으로 앞으로 굳건히 나아 가시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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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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