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남에게 베풀고 자신이 졸업한 모교를 사랑해 팔순의 나이에 교지를 제작했던 고 이병권씨는 “의와 정직을 행하면서 남에게 이로운 사람이 될 것을 당부했다”고 유족측은 밝혔다.
“부친이 돌아가신 지 1년여가 넘었지만 요즘처럼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으로 너나 할 것없이 힘든 시기에 의와 정직을 강조하신 부친의 삶이 더욱 생각이 납니다”
지난 2018년 6월18일, 85세의 나이에 별세한 이병권(사진)씨의 장남 이규선 전 나라, 윌셔, 중앙은행 부행장(금융컨설턴트)은 “부친은 평생 자신이 가진 것이 있든 없든 항상 베풀면서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라고 강조하셨다”고 회고했다.
이병권씨는 지난 1934년 경기도 안성시 죽산리에서 부친 이흥옥씨와 모친 신답례씨 사이에서 3형제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안법고등학교(1회 졸업) 재학시절 교장이었던 노기남(바오로) 신부가 교가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학생들에게 공모를 했는데, 가사가 당선된 것이 인연이 되어 안법교지 1회 편집장을 역임했다. 안법 고등학교는 1909년 1월15일 프랑스 선교사 공안국(Gombert Antonio) 신부가 세운 천주교 계통의 학교로 1951년 정식 고등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장남 이규선씨는 “같은 동향인 청록파 시인 혜산 박두진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안법고교의 교사들이 당시 ‘학생 이병권’에게 교지 1회 편집장을 맡긴 것은 부친에 거는 기대가 그만큼 컸다는 사실을 반영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청운의 꿈을 안고 1953년 청주대학에 입학했으나, 1년간 대학을 다니다가 집안 형편이 어려워 중퇴한 후 당시 흥국생명보험에 다니면서 1955년 박경순씨와 결혼해 2남2녀를 두었다. 이씨는 1965년 경영하던 사업이 크게 실패하면서 약 10여년간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야했다. 그는 타개책으로 동생(이병용)이 독일에 광부로 갔다가 1960년대 말 미국으로 이민가 애틀랜타에서 오토바이 비즈니스로 자리잡은 것을 보고, 동생에게 미국으로 가족초청해 줄 것을 요청했다. 형 이병철은 당시 성동경찰서의 경감이었고, 미국에서 먼저 기반을 작은 막내 동생의 초청으로 1970년대 초반 먼저 애틀랜타로 가족이민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1974년 마침내 이병권씨가 형제초청 이민의 차례가 왔을 때는 무역회사의 중역으로 자리를 이미 잡고 있어서 억지로 이민을 가는 것보다 생활이 가능하다면 한국이 낫지 않느냐면서 한국에 머물기로 결정했는데 가족의 반발이 심했다.
대학입학시험을 치는 둥 마는 둥 한 큰 아들(규선)과 입시를 치러야 할 두 딸(경원·고등학교 2학년, 경희·중학교 3학년)이 영어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해놓고 이민을 안 가면 어떻게 하냐고 따졌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생활에서 먼저 기반을 잡은 동생 이병용씨가 모든 것을 책임질테니 이민을 오라고 권유하는데다 형 이병철씨도 가족이 합치자는 제의에 이병권씨가 다시 이민 수속을 하면서 마침내 1979년 미국으로 가족 이민 길에 오르게 되었다. 1975년에 큰 형, 작은 동생 가족은 애틀랜타에서 LA로 이주한 후였다.
그래서 한국에서 가져온 돈으로 형과 동생의 도움을 받아 노스리지에 주택을 매입하고 차 두 대를 사서 동생과 함께 리커스토어를 경영하게 되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돌아가고 미국생활 정착도 안정될 즈음에 동생 병용씨가 갑자기 뇌졸중으로 1982년 세상을 먼저 등졌다.
장남 이규선씨는 “작은 아버지의 급작스런 죽음에 이어 작은 어머니마저 1년여 후에 세상을 떠나는 것을 지켜보면서 부친이 충격을 받고 미국에서의 삶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병권씨는 1년후에 리커 스토어 운영을 접었으며 청소 일도 하고 한국에서 무역일도 하면서 한국과 미국을 오가는 생활을 했다.
미국 생활을 하면서도 1979년 9월17일 한국의 안법고교 교가 작사자로서 모교 ‘안법’을 찬양하고 번영된 미래상을 부각시키며 동문간의 친목과 단결을 이룩하는 데 앞장선 공로를 인정받아 김남수 안법고교 이사장(주교)으로부터 감사패를 수상하기도 했다.
특히 2014년부터 한국의 큰 딸 집에 기거하면서 옛 친구들과 스승들을 만나며 행복하게 지내는 동안 모교 안법고교의 교지를 만드는 일에 주력했다. 3년을 목표로 추억이 많았던 모교의 후배들에게 그동안 끊어졌던 교지를 제작하고, 장학회를 만들어 가정형편이 어려운 후배들의 학업을 돕는 일에 앞장섰다. 한국에 귀국한 지 얼마안 돼 간암 선고를 받은 가운데서도 모교의 교지를 제작하는 일을 마무리 지었다. 2018년 4월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예견한 듯이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인사를 나눈 후 미국의 자택으로 돌아와서 지인들과 인사를 나눴고 6월 초순 간병인이 집에 와야할 정도로 병이 악화된 후 가족들과 생일파티를 한 후 숨을 거두었다.
이규선씨는 “부친이 항상 남에게 이웃에게 도움을 주고,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의미로 ‘이로운 사람이 되자’를 가훈으로 정했고 집에 ‘홍익인간’을 붓글씨로 써서 붙여놓으셨다”며 “가족들이 아버지의 유훈을 받드는 삶을 살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병권씨 유족으로 부인 경순씨, 장남 규선·차남 규현(다운타운 의류업 경영)씨,장녀 경원(캐롤)·차녀 경희(그레이스· LA글로벌 CEO 3기, 미러클 화장품 대표)씨와 5명의 손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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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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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넌은걸 가족사진까지올리고 돌아가신분이 마음이 편치안으시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