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낭만파 시인 셀리는 ‘겨울이 오면 봄은 멀지 않으리’라고 노래했다. 금년도 춥고 어두운 겨울의 터널을 지나면 약동하는 새봄이 곧 오리라.
봄이 되면서 움츠렸던 몸을 추스르게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 산과 들에 다투어 피는 꽃이다. 이른 봄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매화, 산수유를 비롯한 개나리, 진달래, 벚꽃 등이 뒤를 이어 자태를 뽐낸다. 그들은 우리에게 달려와 겨우내 더께 묻어 처진 어깨를 주물러주고 두 팔로 기지개를 켜게 만든다. 봄이 이런 꽃들을 동반하며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다면 얼마나 감흥이 덜할까.
지난해 겨울이 지나 새봄을 맞을 즈음이었다. 가는 겨울이 아쉬운 듯 아직 추위가 잔설처럼 버티고 있을 때였다. 그때 나는 지독한 감기로 고생을 했다. 감기란 놈이 슬며시 불청객처럼 찾아오더니 한 달 가까이 되었는데도 돌아갈 기색이 없다. 곧 낫겠지 하는 기대는 번번이 빗나갔다. 몸은 천근만근이었고, 근육까지 욱신거렸다.
감기가 삼 주일 정도 되었을 때, 약을 먹어도 잘 낫지 않으니 병원에 가서 영양제 주사를 맞아 보기로 했다. 침대에 누워 한 시간 반이나 팔뚝에 링거를 맞으며, 눈을 감고 이런 생각 저런 생각으로 사색의 늪에 빠졌다.
‘내 감기는 인간이 뿜어대는 혼탁한 공기 때문에 걸렸는지 몰라. 오염 강박증세가 병을 키웠을 거야. 내가 맞는 이 수액은 지구 밖에서 가져온 증류수 같은 무공해 약이 아닐까. 그게 감기가 나을 수 있는 비방이겠지. 세상의 오염을 싫어하는 결벽증으로 감기에 걸린 게 분명해. 그러니 어디 쉽게 낫겠어?’ 푸념인지 독백인지 구시렁대며 나름대로 위안으로 삼기로 했다.
팔뚝에 주사를 다 맞은 후, 아슴아슴 병원을 나오니 건너편 건물에 있는 성형외과 간판이 한눈에 들어왔다. ‘저런 병원에서 마음마저 성형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치 다리미로 구겨진 마음을 바르게 펴는 것처럼 말이야’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머리는 온통 뒤죽박죽이다. ‘춘설이 난분분하니 필동말동하여라’든지, ‘봄이 왔으나 봄 같지 않은 봄이다’라는 시 구절이 스쳐 갔다. 황량한 내 마음이 바로 그 시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다.
그러던 중, 어느 지인이 스마트폰으로 문자를 보내왔다. 감기에 파묻혀 사는 내가 안쓰러운지 개나리꽃의 일화를 보내주었다.
‘호주 시드니에 사는 어느 교포가 한국의 개나리가 너무 아름다워 그 가지를 꺾어다 그곳에 심었다. 개나리는 가지와 잎이 무성하게 잘 자랐지만, 이, 삼 년이 되어도 꽃은 피지 않았다. 그 교포는 한국처럼 겨울에 혹한이 없는 호주에서는 개나리꽃이 피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라는 내용이다.
친구가 보내준 메시지를 보고 감기가 내 삶의 꽃을 피우기 위한 단련쯤으로 치부하기로 했다. 겨울처럼 춥고 매서운 시련을 겪은 후에 보석처럼 꽃피우고 열매 맺는 그것들, 어느 시인의 말처럼 흔들리며 피지 않는 꽃이 없고 대추 알이 그냥 붉어질 수 없는 일이다.
거머리같이 달라붙는 감기와 같이 맞이했던 봄, 그해에도 봄은 오고 꽃은 피었다. 산에, 들에, 길거리에, 정원에, 베란다에 계절은 어김없이 꽃을 토해내었다. 감기를 오래 앓은 눈으로 보기에는 아직 봄눈이 어지럽게 내리고, 봄 같지 않은 봄이다. 어찌 눈에 보이는 봄만이 진정 봄이겠는가. 봄이 서러운 사람에게는 진달래꽃이 불그레한 쓰레기로 보이고, 개나리꽃은 나무숲에 숨어 안 보일지 모른다. 손끝에 만져지는 봄이 아니라, 눈을 멀리 열고 가슴으로 맞이하는 봄이 진짜 봄이 아닐까. 봄이 안 오는 게 아니라 봄을 맞이하지 않을 뿐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이웃에서 살다 간 어느 장애인은 ‘삼 일만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다면...’ 이렇게 소원을 기도한 사람이 있다. 그에 비하면 나의 봄 투정은 사치일지 모른다. 꽃이 필 때는 비바람이 휘몰아친다고 했다. 눈높이를 낮추어 보면 나의 감기쯤은 별 것 아니다. 또 다른 성장을 위한 면역 주사쯤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봄눈이 어지럽게 내리고 봄 같지 않은 봄이 와도 자연이 연주하는 봄의 숨겨진 교향곡은 멈추지 않는다. 귀를 크게 열고 새봄이 오는 소리를 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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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원 / 맥클린,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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