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LKZ-TV 아나운서 공채 1호·미주한국어 TV방송과 인연
▶ 서예에도 남다른 조예… 본보 신년·창간특집에 휘호 남겨
고 김봉구 회장은 한국일보가 1954년 창간되었을 때부터 구독을 시작, 한국일보의 애독자로 본보의 신년과 창간특집 등에 휘호를 남기기도 했다.
고 김봉구 회장은 평생 방송을 사랑했으며 또한 뒤늦게 입문한 서예에도 상당한 기량을 발휘했다. 김 회장이 자신의 작품‘화기만당’을 배우 김지미씨에게 선사하고 있다.
대한민국 아나운서 공채 1호로 미주지역에서도 최초로 한국어 TV방송을 시작한 김봉구 미주방송인협회 명예회장이 지난 9일 샌개브리얼 자택에서 별세한 것으로 뒤늦게 밝혀져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향년 89세.
유족측에 따르면 지난 1월 중순경 간암진단을 받은 김 회장은 병원에서 적어도 2년 가까이 더 생존할 수 있는 것으로 전해 들었으며 실제로 사망 전까지 건강하게 살다 지난 9일 오전 수면중 별세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례식은 생전에 고인의 유언에 따라 지난 12일 가족장으로 조촐하게 치루어졌으며 유족으로 고 김인애 여사(부인), 4남1녀의 자녀가 있다.
대한민국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 HLKZ-TV 아나운서 공채 1호로 1956년 5월12일 첫 방송을 시작했던 고 김봉구 미주방송인협회 명예회장은 1967년 TV 연출공부를 위해 도미한 후 1972년 4월 LA에서도 최초로 한국어 TV방송을 시작한 뉴스캐스터이다. 평생을 방송인과 언론인으로 역사의 현장을 넘나들었던 김봉구 회장은 한국 TV뿐만 아니라 미주동포 TV방송의 산 증인이자 역사이기도 하다.
그의 꿈은 원래 정치인이었다. 경복 중학교(6년제) 졸업후 1956년 동국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그러나 평소 방송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1956년 한국에 처음 탄생한 HLKZ-TV 방송의 공채에서 100대 1이 넘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대한민국 최초의 아나운서로 선발되었다.
그는 11년간 한국에서의 잘 나가던 아나운서 생활을 접고 TV연출 공부를 위해 1967년 청운의 꿈을 안고 도미했다. 그가 처음 LA에 왔을 때 LA에 3천명 정도의 한인이 있었으며 크렌셔와 제퍼슨 코너에 고려식당이 있었다고 한다. 일단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가 일자리를 잡은 곳이 플라스틱 뚜껑 제조공장인데 보통 오후 4시부터 자정까지 일을 했으며 시간 당 임금이 1달러 80센트였다.
한 번은 1967년 12월의 어느 겨울날, 근무를 끝내고 나오니 버스편이 끊겨 한인타운 인근 아파트까지 밤새도록 걸었다. 그는 생전에 “이민 초년병으로 누구나 다 하는 고생이라곤 하지만 그날 밤 너무 춥고 서러워서 펑펑 눈물을 흘렸다”고 밝혔다.
그는 1971년 LA에서 열린 패티 김의 동포위문공연 사회를 보면서 우연히 편성 PD로 일했던 배함덕씨를 만나 ‘미주한국어 TV방송(Ch22)’ 개국의 실무역할을 맡았다. 1972년 한국어 TV 방송국이 처음으로 LA에서 문을 열면서 개국 방송을 했던 그는 생전에 “먼저 애국가를 내보내고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하는 멘트를 하는 데 감개가 무량해서 목이 메이고 절로 눈물이 나왔다”고 말했다.
1976년 KBC 방송 초대방송국장, 1983년 KBLA 한인방송 뉴스 캐스터, 1984년 KITN-TV 교육방송 뉴스 캐스터 등을 지낸 김봉구 아나운서는 “한국에서 한국 전쟁후 격변기를 견디며 방송을 했고 한국어 방송을 한다는 것 자체가 힘들었던 미국에서도 TV 방송의 개척자로 방송발전에 기여한 점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정영호 전 재미방송인협회/여의도 클럽 USA 회장은 “한 평생 방송 외길을 걷다가 갑자기 혼자서 조용히 먼 길을 떠나신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며 “김봉구 회장은 정말로 방송을 사랑했던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김 회장은 한국일보가 1954년 창간되었을 때부터 구독을 시작해 LA에서도 1969년 창간호부터 미주한국일보를 구독했던 한국일보 애독자이기도 하다.
그는 1977년 1월16일 회원 16명과 미주방송인협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을 맡아 방송인의 질적 향상을 위해 세미나를 진행하는 일을 하면서 2002년에는 방송인의 대변지 ‘미주방송’을 창간했다.
70세가 넘어서야 입문한 붓글씨에서 그는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 등 5가지 서체를 모두 섭렵하고 급기야 2008년과 2010년의 한국 민족서예대전에서 예서체와 초서체 작품으로 두 차례 특선에 뽑혔고 본보의 신년과 창간특집 등에 휘호를 남기기도 했다.
김봉구 회장의 모교 동국대학교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다. 동문회에서도 신화적인 존재로 존경했다고 한다. 강병선 전 남가주 동국대 동문 회장은 “고 김 회장이 고령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빠짐없이 동문 모임에 참석해 동문회의 활성화에 큰 기여를 했다”며 “늦게 나마 김 회장을 추모하는 모임을 유가족과 상의해 가질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는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공감하고 감동하는 말을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한인사회가 세대간에 소통이 잘 되고 화합하고 단결하기를 죽는 순간까지도 간절히 기원했다. 고 김봉구 회장은 본보와의 신년 인터뷰에서 “언론인은 모름지기 격조놓은 지성과 따듯한 인간미를 겸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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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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