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카운티 샌타애나의 한 주택가. 한적하게 보이지만 천만에-. 사는 게 아슬아슬한 곳이다. 멕시코에서 월경하면 바로 넘어오는 동네 중 한 곳. 단순노동 종사자가 많고, 결손 가정도 많다. 청소년 문제는 악순환처럼 반복된다. 집 앞에 차가 많은 것은 한 집에 여러 가족이 함께 사는 다가구 주택이기 때문이다.
이런 동네에 악기를 멘 아이들이 오가는 건 낯선 풍경이다. 하지만 토요일 아침이면 동네 아이들이 악기를 들고 커뮤니티 센터인 키드웍스에 모여든다. 배우려는 학생들은 5~12살의 라티노 어린이, 가르치는 자원봉사자는 한인 고교생들이다.
짧은 겨울방학이 끝난 뒤 다시 모인 아이들은 바이올린, 첼로, 클라리넷, 트럼펫, 플룻 반 등으로 흩어져 연습을 시작했다. 기부 받은 중고 피아노 2대에다 키보드 6대를 더해 피아노 교실도 열 수 있었다. 악기는 모두 무상 대여. 집에 가져가게 하지만 연습해 오길 크게 기대하지는 않는다. 지난 2008년 10월에 시작해 12년째 계속되고 있는 샌타애나의 ‘러브 인 뮤직’(LM) 현장이다.
가르치러 온 학생이나 배우러 온 학생들 중에는 처음에는 마지못해 부모에게 이끌려 온 경우도 있다. 주말이니 게임이나 하며 놀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프로그램이 진행되면서 자원봉사 고교생들은 나눔과 도움이 무엇인지, 배우는 학생은 악기를 통해 몰랐던 세계를 처음 맛보게 된다.
“교회에서 봉사자 모집 전단을 봤다. 마침 학교에서 요구하는 자원봉사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왔다. 아이들도 부모 손에 끌려 온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들이 음악과 맺는 관계가 점차 성숙해가고, 열심히 몰두하는 모습들을 보며 새삼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
“대학입학에 필요한 과외활동 난에 써 넣기 위해 왔다. 인종과 문화의 장벽을 넘어 아이들에게 다가서려는 LM 관계자들의 열정이 나를 겸손하게 했다. 나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세계에 갇혀 살았다는 걸 알았다.”
LM 사이트(loveinmusic.org)에 올라 있는 일부 자원봉사 학생들의 글을 간추린 것이다. 타인종 커뮤니티, 특히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이들의 세계와 접할 기회가 없었던 자원봉사 학생들 중에는 LM 체험이 가치관 형성과 대학졸업 후 직업선택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부모 등쌀에 배우러 왔던 아이들도 마찬가지. 5년, 7년씩 레슨을 받으러 오는 학생도 있다. 이들이 악기를 계속할 수 없는 순간이 온다고 해도 어릴 때 경험했던 클래시컬 뮤직의 기억은 이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자양분이 될 것이다.
LM은 굳이 이름이 알려지길 원하지 않는 ‘뜻있는 소수’에 의해 지난 2007년 5월 시작됐다. 폭동을 통해 한흑 갈등의 아픔을 경험했지만 다인종 사회에서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인종갈등, 특히 한-라티노 관계에 눈을 돌린 게 직접 계기였다. 처음 사우스 LA에서 시작된 LM이 지금은 LA, 가디나, 샌타애나 등 3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동안 여러 곳을 옮겨 다닌 것은 주말에 장소를 제공해 줄 마땅한 파트너 기관을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지금 참여하고 있는 자원봉사 고교생은 80여명, 100여 명의 어린이들이 레슨을 받고 있다. 그새 거쳐 간 자원봉사자는 300여명으로 악보를 챙기는 등 교실 밖의 온갖 일은 자원봉사 어머니들이 돕고 있다.
LM이 처음부터 지역주민의 환영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왜 이 사람들이 여기 들어와 우리 아이들에게 악기를 주고, 무료 레슨까지 해준다고 하지?” 의아한 눈빛으로 지켜보던 주민들이 마음 문을 열기까지는 샌타애나의 경우 3년 반 이상이 걸렸다고 LM의 전 사무국장 박관일 씨는 전한다. 레슨을 받은 동네 어린이들이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서툴지만 최선의 솜씨로 5~6월에 정기음악회, 연말에는 성탄음악회를 열고 학부모와 이웃주민들을 초청한 것은 이들에게 의미있는 선물이 됐다.
어려운 것 중의 하나는 악기 확보라고 한다. 기부도 받지만 때로 사기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만간 기금모금 행사를 계획하고 있다고 글로리아 이 사무국장은 전한다.
문득 엘 시스테마, 빈민촌 어린이들에게 무상 음악교육을 제공해 이들을 범죄로부터 보호하고, LA필 지휘자인 구스타브 두다멜 같은 인재도 배출한 베네주엘라의 예가 생각난다. 물론 국가가 지원하는 이런 프로그램에 비할 수는 없겠으나 ‘러브 인 뮤직’ 같은 프로그램을 남가주뿐 아니라 타 지역 한인사회에서도 시도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LM 같은 자원봉사 프로그램의 필요성과 이를 진행할 수 있는 여건과 토대는 다른 지역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비전을 갖고, 네트웍만 만들 수 있다면 꿈으로만 그칠 일이 아니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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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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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뜻깊고 좋은 활동이라고 생각됩니다. 좋은 기사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