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밀레니얼 청문회, 육아예능 속 아이들
‘육아는 개인 책임’ 인식에 현실선 아동 배려 부족한데 프로그램선 열정적 소비 모순
▶ 육아 예능·아동 유튜버 전성기, 아동 상업화·인권 비판 커져…놀이 가장한 ‘아동 노동’ 주장까지
아이와 놀아주는 아빠는 ‘슈퍼맨’, ‘육아는 엄마 몫’ 프레임만 강화…‘육아도 결국 경제력’에 박탈감, 예능보다 정책·교육 필요한 때
육아예능 전성시대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2015년까지 방영된 MBC ‘아빠 어디가(이하 아어가)’, 여전히 큰 사랑을 받고 있는 KBS ‘슈퍼맨이 돌아왔다(이하 슈돌)’ 등의 프로그램은 화면 속 귀여운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결혼과 육아에 시큰둥한 밀레니얼 세대마저 ‘사랑이’, ‘삼둥이’의 필살 애교 앞에선 넋이 나갔고, 급기야 너도나도 ‘짤(온라인에서 유통되는 방송 이미지)’을 생산했을 정도입니다. 비록 TV나 휴대폰 화면을 사이에 둔 원격 관계지만, 아이들에게 깊은 애정을 쏟는 사람들이 많아지다 보니 ‘랜선 이모’, ‘랜선 삼촌’이라는 말까지 생겼습니다. 최근엔 이런 인기를 등에 업고 ‘아동 콘텐츠’가 브라운관 바깥으로까지 영향력을 넓혔습니다. 무서운 속도로 생겨나고 있는 유튜브 채널들은 아동 콘텐츠의 성장세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나 성장이 거듭될수록 우려 섞인 시선도 덩달아 쏟아지고 있습니다. 미디어 속 아이들이 지나치게 상업화되는 것은 아닌지, 카메라 앞에 선 아이들의 인권은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 사회 구성원들이 미처 합의하지 못한 고민들이 동시에 모습을 드러낸 겁니다. 육아예능 전성시대에 아이들을 꺼려하는 ‘노키즈존’이 우후죽순 생겨나는 모순적 상황도 목격됩니다.
그렇다면 밀레니얼 세대들은 화면 속 천사 같은 아이들의 미소를 통해 현실 속 육아의 실체를 제대로 느낄 수 있을까요. 그리고 다가올 육아의 미래를 제대로 발견할 수 있을까요.
육아예능, 마냥 즐겁게 보지 못해피곤한 칸트(이하 피칸)=격투기 선수 추성훈씨의 딸 사랑이를 보고 ‘슈돌’에 입문했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삼둥이가 등장했지. 당시 삼둥이 달력을 살까 말까 고민할 정도로 열성 팬이었어.
도논=난 ‘슈돌’보다 먼저 나온 ‘아어가’를 즐겨 봤어. 어느 정도 성장한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말하고 행동하는 모습에 마음이 끌렸어.
배부른 소크라테스(이하 배테)=나도 삼둥이를 좋아했지만, 언젠가부터 육아예능을 마냥 웃으며 볼 수 없게 됐어. 소비 행태에서 문제점이 느껴졌거든. 육아예능 초창기 때 방송에 나온 아이가 원하는 숙소에 배정받지 못했다고 아빠에게 떼를 많이 썼던 적이 있어. 방송이 나가고 일주일 내내 온라인상에서 비난을 받더라고. 가정교육에 문제가 있다는 등 비난 수위도 심했지. 아버지가 다른 프로그램에 나와서 그 일을 회상할 정도였으니깐. 시청자들에게 아이들을 마음대로 비난할 권리까지 쥐어 준 모습을 보니까 ‘이건 아니다’ 싶었지.
날펭=방송에 형제나 자매가 나오게 되면 둘 중 누가 더 착하고 양보를 잘 하는지, 누가 욕심이 많은지 평가하는 일도 빈번했어. 그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부모 동의 하에 나왔다고는 하지만, 아이들은 시트콤 캐릭터가 아니라 실존하는 미성숙 존재잖아. 그런데도 너무 자연스럽게 평가 대상이 돼버리잖아. 이런 예능 프로그램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아이들을 ‘호불호’ 대상으로 삼을 일이 있었을까.
도쎄=나도 비슷한 이유에서 육아 예능을 멀리하게 됐어. 우리가 아이의 자연스러운 성장과정을 용납하지 못하고 정제된 모습만 요구하고 있는 게 가혹하다고 느껴졌어. 게다가 ‘영악하다’고 비난 받지 않으려면 적당히 ‘아이다운’ 모습도 보여줘야 하잖아. 시청자들이 허락한 적정선 안에서 충분히 귀엽고 신선한 아이, 그런 수요에 맞추는 건 너무 비윤리적이야.
숭례문 뽀글이(이하 뽀글이)=방송이 거듭될수록 아이들 나이가 점점 어려지더라고. 우리가 더 마르고 예쁜 아이돌을 좋아하듯이, 아이들도 더 어리고 귀여울수록 인기가 높은 걸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니까 어느 순간 섬뜩해지더라고.
아동 콘텐츠는 놀이와 착취의 경계도논=요즘은 꼭 연예인 자녀들만 미디어에 노출되는 건 아니야.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에도 아이들 콘텐츠가 굉장히 많아. ‘셰어런팅’이라는 신조어도 생길 정도니까. 공유를 뜻하는 ‘셰어(share)’에 양육을 뜻하는 ‘패런팅(parenting)’을 더한 말인데, 부모가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자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올리며 성장 과정을 공유하는 거야.
도쎄= 방송은 공식적인 통로니까 그나마 내용이 정제가 되는 편이야.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처럼 일반인이 쉽게 접근하고 이용할 수 있는 영역에선 지켜야 할 기준에 대한 합의가 덜하니까 ‘심하다 싶은 콘텐츠’가 나오기도 해. 특히 특정 상황에 아이들을 놓고 리얼한 반응을 찍는 경우, 아이가 엉엉 우는 모습이 확대돼서 동영상 썸네일(축소판)을 가득 채우곤 해. 그 전까진 ‘귀여운 모습을 귀엽게 소비한다’ 정도였다면, 이제는 놀라거나 울음을 터트리는 상황까지 익살스럽게 연출해서 콘텐츠로 만들어내는 거지. 난 그걸 보고 있으면 약간 자괴감이 들어.
뽀글이=언론에서 과한 영상을 문제 삼으면 ‘아이들이 충분히 동의했다’는 반박이 따라와. 그런데 그렇게 어린 아이들이 동의한다는 의사를 어떤 방식으로 밝혔다는 건지 잘 모르겠어.
불주먹=어른 기준에서 아이가 동의했다는 믿음, 그리고 우리 아이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는 부모가 제일 잘 안다는 믿음이 있는 것 같아. 아이의 초상권도 부모가 알아서 하면 된다고 생각하잖아. 그런데 부모라도 자식의 동의 없이 사진이나 영상을 찍어 올리면 처벌하는 나라도 있잖아.
날펭=2017년에는 세이브더칠드런(아동권리 실현을 위해 활동하는 국제단체)이 유튜브 키즈 채널 운영자 2명을 아동학대 혐의로 경찰에 고발한 적도 있어. 아이들이 주체적으로 영상을 찍어 올리는 게 아니라, 부모가 기획한 영상으로 지속적인 수익이 창출되는 구조라면 그건 ‘놀이’를 가장한 ‘아동 노동’이란 주장도 있어. 정말 노동의 측면이 있다면, 아동 착취가 되지 않게끔 정해진 룰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해.
도논=아이들 모습을 단순히 찍어서 간직하는 게 아니라 콘텐츠로 만드는 문화가 확산되고 있잖아. 그런데 그런 흐름에 맞게 우리 사회가 미디어 속 아이들의 인권에 대해 심도 있게 고민하고 있는지 의문이야. 아동 예능이 폭발적으로 생겨나자 뒤늦게 문제점이 지적됐고, 몇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논의가 진전되고 있잖아.
도쎄= 최근 ‘독일에 육아 예능이 없는 이유’라는 칼럼을 읽은 적이 있어. “독일 미디어는 아이를 소비하는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아이는 소비할 대상이 아니라, 미디어 교육을 해야 하는 대상이다”라는 대목이 인상 깊었어. 아이들이 미디어 환경에 대한 인식을 확실히 갖출 수 있게 도와주고, 나름의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 난 그럴 나이가 되지 않은 아이들까지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것에 반대해.
예쁨 받는 아이들, 밖으로 나오면 눈총
도논=육아 예능의 인기는 높아지는데 ‘노키즈존’이 확산되는 모습이 처음엔 굉장히 모순적으로 느껴졌어. 노키즈존이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자리잡을 정도로 아동을 배려하지 않는 한국 사회가, 아동 예능은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건지 이해가 안 돼.
피칸=두 현상의 뿌리는 결국 똑같은 것 같아. 프로그램 속의 귀엽고 천사 같은 아이들의 모습은 열정적으로 소비하지만, 그 틀을 벗어난 현실 속 아이들의 행동에는 가차 없이 대하는 거잖아. 화면으로 볼 때는 귀여웠던 아이가 내 옆에서 떼를 쓰니까 바깥으로 쫓아내는 거지. 그리고는 귀여운 ‘짤’만 공유하는 모습이 왠지 서글프기도 해.
도쎄=노키즈존이 혐오가 아니란 주장이 아직도 팽배한데, 난 명백한 혐오라고 생각해. 행위에 대한 금지가 아니라 정체성 자체를 배제하는 거잖아. 그것도 배제하기 손쉬운 약자만을 대상으로 말이야. 친구들 사이에선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중년 남성에게 폭언이나 성희롱을 당했다는 경험담이 많이 공유되거든. 그렇다고 ‘노중년존’이 생기지는 않잖아.
날펭=저출산이 심각한 문제라고 강조하면서도 막상 아이를 배려하는 모습은 현저히 부족해. 육아를 하지 않는 다른 집단에게 절대 피해를 주지 말고 ‘알아서 잘 키워보라’는 식이야. 자본주의 사회에서 제값을 지불한 사람들의 권리는 완벽하게 보장돼야 한다는 인식도 강하니까. 이런 풍토 속에선 ‘아이는 사회가 같이 키운다’는 인식은 감히 끼어들 틈이 없어.
뽀글이=최근 스타필드에 가보니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아이들이 많더라고. 거리에도 카페에도 보이지 않던 아이들이 거기에 다 있는 것 같았어. 미친 듯이 뛰어 노는 모습을 보다 보니, 아이들이 우리 눈에 안 보이게 특정 공간에 격리 당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
도논=아이는 원래 예상 밖의 행동을 하고, 통제가 어려운 존재야. 우리도 아는 사실을 왜 사회가 함께 고민해주지 않는지 이해가 안 가. 맞벌이 가정은 점점 늘어나고 아이들은 앞으로 더 공공장소에 자주 오게 될 텐데, 각자 자기 아이를 알뜰히 챙겨야 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 어떤 비난이든 감수해야 한다는 발상은 너무 가혹해. 근본적인 고민을 하기 싫어서 책임을 떠넘기는 것 같기도 하고. 달라진 시대엔 오히려 책임을 나눠지는 방법을 고민해보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
배테=이런 현실적 고민이 필요한데도, TV나 유튜브에는 당장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천사 같은 아이들의 모습만 넘쳐나. 현실과 괴리감이 커.
육아 예능보다 정책과 교육이 필요
도논=나도 방송에 나온 귀여운 아이들 사진을 프로필로 설정하거나, 앨범에 가득 쌓아두고 우울할 때마다 본 적이 있어. ‘짤’을 만들어서 공유하는 건 우리 세대 주특기이기도 하니까. 근데 정말 재미있는 건, 친척들이 그런 나를 보고 “그렇게 아이를 좋아하면 빨리 시집 가야겠네!”라고 말하는 거야. ‘랜선 이모’를 자처하는 것과 엄마가 되고 싶은 건 엄연히 다른데 말이지. 그냥 웃음만 나와.
뽀글이=우리는 이미 현실 육아와 예능이 다르다는 걸 너무 잘 알잖아. 사실 ‘슈돌’ 방송만 해도 그래.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프리랜서 아빠가 아이들과 며칠 시간을 보낸다고 그게 육아의 전부는 아니잖아. 방송이 모두 거짓이라는 게 아니라, 그들과 우리 사이엔 명백한 격차가 있으니까. 그러니 ‘랜선 이모’ 역할은 좋아도, 실제 엄마가 되고 싶은 마음은 안 드는 거야.
도논=많은 육아 예능들이 아버지의 참여를 내세우잖아. 그런데 아버지 혼자 아이들을 돌본다는 설정 자체도 전혀 신기하거나 감동적이지 않아. 육아에 서툰 모습을 보면 결혼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되새길 뿐이야. 성장해가는 아빠들의 모습에 희망을 느낀다거나 나를 대입해보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어.
피칸=‘슈돌’에 나왔던 가족들 중 엄마가 매일 근무하는 판사고, 아빠가 배우인 경우가 있었어. 그 상황에서 평소 아이들을 돌봐야 할 사람은 그나마 여유가 더 있는 아빠잖아. 우리한텐 그게 너무 당연한데, 해당 방송은 마치 그런 아빠가 아이들과 놀아주는 게 특별한 이벤트라도 되는 것처럼 ‘슈퍼맨’이란 호칭을 붙여버렸어. 결국 ‘육아는 엄마의 몫’이라는 프레임만 강화해서 거부감이 들었지.
날펭=불편한 감정은 또 있어. 방송에 나온 것처럼 아이들을 위해 오롯이 48시간을 비울 수 있는 부모가 몇 명이나 될까. 현실과 동떨어진 육아 예능을 통해 아이에 대한 로망만 커진다면, 그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해. 현실과 낭만을 구분하지 못해 생긴 환상일 뿐이니까.
피칸=물론 방송이 즐거운 모습만 보여주는 건 아니야. 진땀 빼는 아빠들의 모습을 보면 육아가 만만치 않다는 건 알겠어. 그런데 방송에서 그런 난관이 해결되는 방식을 자세히 뜯어 보면, 결국은 출연진들의 경제적 뒷받침이 필수적이라는 게 뻔히 드러나잖아. 방송은 ‘위대한 가족의 사랑’으로 마무리되지만, 내가 방송을 보면서 얻게 되는 교훈은 ‘역시 돈 없으면 안되겠다’는 거야.
배테=미디어를 통해 정말 육아를 독려하거나 돕고 싶다면, 마냥 아름답고 숭고하게만 그릴 것이 아니라 적나라한 논의도 함께 포함시켜야 한다고 봐. ‘낳으면 저절로 큰다’는 믿음을 심어주는 것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아. 우리가 육아의 현실을 뻔히 알아버린 이상, 예능보다 시급한 건 실효성 있는 육아 정책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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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이정원 인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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