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민사 소송법에 있어 중요한 원칙 중 하나가 성숙성(ripeness)이다. 사건이나 쟁송이 법원의 심리를 받을 만큼 성숙했는지를 살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지 않다고 판단되면 법원이 심리하기를 거부한다.
그런데 이러한 일반적 원칙에 반한 법원의 심리가 최근에 있었고 그 내용이 올해의 미국 대통령 선거에 큰 영향을 줄 것 같다.
성숙성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하나 들어 보자. 건물주와 세입자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세입자는 건물주가 해야 할 책무를 다 안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건물주에게 책임은 다 안하면서 어떻게 월세는 받느냐며 항의한다. 월세는 매달 첫 날에 지불한다. 이에 건물주는 아직 지불기일이 되지 않았지만 세입자가 다음 달 월세를 안 낼 것을 확신한다.
그러나 만약에 이 시점에 건물주가 소송을 제기한다면 법원은 소송을 기각할 것이다. 아직 세입자의 월세 지불 의무 불이행은 일어나지 않았고 따라서 쟁송이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에 플로리다 주 대법원이 전과자의 투표권 회복에 관한 ‘자문의견 (Advisory Opinion)’을 하나 발표했다.
플로리다 주는 특이하게도 주 헌법에 아직 쟁송이 성숙하지 않은 사항이지만 주지사가 행정부의 수반으로 어떤 업무 집행에 있어 적법 여부를 문의할 경우 그에 대한 의견을 밝히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의견을 밝히는 과정 중 해당 사안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들이나 단체의 의견을 청취하게끔 되어 있다.
플로리다 주는 2018년 11월 선거 때 전과자들의 투표권 회복에 관한 주민투표도 같이 실시했다. 결과는 찬성이 64% 이상으로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런데 주민투표 결과를 실행에 옮기는 행정 업무의 총 책임자인 주지사가 작년 8월에 주민투표 안에 포함되었던 투표권 회복의 조건인 ‘선고의 모든 조건을 마친 후’라는 문구에 대해 주 대법원에 해석을 요청했다. 즉, 투표권 회복 실행에 대한 조치 없이 주 대법원의 유권 해석을 요청한 것이다.
그러니까 전과자 중 그 누구도 아직 주지사가 주민투표 결과에 반한 행위를 했다고 소송을 벌일 수 있을 만큼 쟁송이 ‘성숙’되지 않았지만 주지사는 주 헌법이 허용하기에 주 대법원에 자문 의견을 신청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플로리다 주 대법원은 지난 1월 16일에 ‘선고의 모든 조건’이라는 문구의 의미에는 법원이 선고한 ‘벌금, 변상액, 법원 수수료’가 포함한다는 의견을 발표했다.
사실 이러한 의견은 주민 투표 후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는 플로리다 주 의회가 같은 내용의 법을 제정하려고 하자 ACLU 등의 민권 단체가 연방법원에 법제정 금지 가처분 신청을 해 놓은 가운데 이루어졌다.
민권 단체들은 전과자가 재정적 부담을 할 수 없는 처지일 경우에도 투표권 회복을 거부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주장한다. 그 만큼 투표권은 ‘특권’이 아니라 ‘기본권’이라는 것이다.
이에 작년 10월 플로리다 주 북부연방지법은 민권단체의 주장을 받아들여 주의회가 그러한 취지의 법제정을 할 수 없다는 가처분 명령을 내렸다. 현재 이 소송은 연방고등법원에 계류 중이다. 재미있는 것은 일반적으로 공화당에 호의적인 보수 연구기관들이 민권단체의 주장에 동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사안이 미 전역의 주목을 받는 이유는 올해 가을에 열리는 대통령 선거에 줄 수 있는 영향 때문이다.
선거 결과가 미시간, 펜실베이니아, 위스컨신, 플로리다 등 불과 몇 개 주에 달려 있다고 할 때, 민주당 성향이 상대적으로 높은 전과자들의 투표권 회복 여부는 그 만큼 중요하다.
어느 한 통계 자료에 의하면 현재 플로리다 주에서 전과기록 때문에 투표권이 상실된 주민 수가 170만명 가량 된다고 한다. 이는 숫자적으로나 주민 수 대 비율으로나 모두 미국에서 최고 수준이다.
트럼프 후보가 4년 전 대통령 선거 때 플로리다 주에서 이겨 선거인단 29표를 독식했을 때 상대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 후보에게 겨우 11만 표 정도 차이로 이겼다. 그러므로 플로리다 주에서의 전과자 투표권 회복 이슈가 관심을 끄는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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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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