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부르크너의 교향곡 8번만큼 다양한 연주를 들려주는 작품도 없다. 분명 악보가 존재할 텐데 들려주는 오케스트라마다 소리가 가지각색이다. 특히 끝은 도대체 형체가 없다. 혹자는 빠르게, 혹자는 느리게 끝맺기도 하는데 대체로 어떤 느낌인가는 하는 감은 있지만 특별한 전형이 없는 것이 이 작품의 특색이기도 한다. 즉 지휘자 마음대로 휘둘러도 별 탈 없이 넘어가는 것이 이 작품의 미스테리라고나할까.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향곡으로 베토벤의 교향곡 9번(합창), 부르크너의 교향곡 8번 등을 꼽기도 하는데 특히 일본 등지에서는 부르크너의 작품을 베토벤 위에 놓기도 한다. 대중적인 인지도면에서는 다소 부족하지만 매니아들 사이에서 부르크너의 인기는 매우 높은 편이다. 나의 경우에도 부르크너의 8번 교향곡을 자주 듣고 있는 편인데 어딘가 맑고 신비로운 선율이 피안의 바다를 헤매는 듯한 해탈감을 주기때문이다. 특히 3악장 아다지오는 무려 35분 가량이어지는데 이 세상의 음악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처연하고 또 저 세상의 음악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이슬처럼 맑은 작품이다. 한마디로 전위적이면서 고전적인 위엄을 모두 갖춘 작품이라고나할까.
음악은 독자와 일대일로 상대하는 문학 등과는 다르게 작곡가와 청중사이를 이어 주는 중간 매개 연주자라는 것이 존재한다. 즉 성서를 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풀이해 주느냐에 따라 믿음의 상태가 달라지듯, 음악 역시 얼마나 좋은 음악을 만나느냐하는 것 못지 않게 얼마나 좋은 연주자를 만나느냐 하는 것 또한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예전에 카라얀이라는 지휘자가 엄청난 인기몰이를 하며 클래식 시장의 아이콘으로 등장한 적이 있었는데 장사꾼이라는 욕도 먹었지만 덕분에 클래식 인구의 저변 확대 및 대중화에 크게 한 몫했었다. 이번에 그가 지휘하는 부르크너의 교향곡을 들으면서 그가 왜 대중적으로 스포트라잇을 받았는가 하는 점을 실감할 수 있었고 또 그가 왜 얍삽한 장사꾼이었는가를 동시에 실감할 수 있었다. 카라얀은 언제나 최고의 음향만을 선사한다. 그것이 부르크너의 작품이 됐던 브람스의 작품이 됐던 상품으로서는 늘 손색이 없는 것이 카라얀의 장점이다. 그러나 그의 예술에는 모험보다는 늘 상품성이 앞서있다. 즉 조련된 소리만 있을뿐 개성이 없다는 것이다. 카라얀의 전임 푸르트벵글러는 이러한 후배의 얍삽한 면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하는데 푸르트벵글러가 급사하는 바람에 베를린 필을 거머쥔 카라얀은 이후 죽을 때까지 베를린 필의 단상을 지키며 수많은 음반들을 남겼고 최고의 인기를 동시에 누렸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지휘자로서, 사람들은 카라얀을 기억할지 모르지만 사실 음의 마술사란 별명은 카라얀보다는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던 조지 셀(George Szell, 1897-1970)에 어울렸다. 카라얀이 세계 최고의 악단을 물려받아 이를 적극 활용해 나간 금수저 출신이었다면 셀은 변방의 이름없는 악단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를 이어받아 세계 최고의 악단의 위치로 올려놓은 입지전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존심이 강했던 카라얀 조차도 셀의 능력만큼은 인정하여 그가 주관하던 짤츠브르크 페스티발에 늘 셀을 초청하곤 했다지만, 셀은 지휘자로서는 한창 나이였던 72세라는 나이로 너무 일찍 단명하고 말았다. 유튜브에 셀이 지휘하는 부르크너의 교향곡 8번이 암스텔담 콘서게보우 오케스트라(Amsterdam Concertgebouw Orchestra - Rec.1951)의 연주로 나와 있다.
부르크너의 교향곡 8번 연주에 있어서 만큼은 어쩐지20세기 최고의 명성 푸르트벵글러보다는 카라얀과 셀의 대결로 좁혀지는데 그것은 현대적인 음향때문만이 아니라 부르크너의 해석이 그만큼 진화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혹자는 뮌헨 필의 첼리비다케의 지휘를 최고의 부르크너 연주로 꼽기도 하지만 그의 지휘는 너무 주관적인데다 대체로 느리다. 그렇지 않아도 참담하게 처지는 부르크너가 첼리비다케의 지휘봉아래 더욱 늘어지게 처져서 듣기에 따라서는 고문처럼 들기기도 한다.
매우 우직한 성격의 부르크너(Anton Bruckner, 1824-1896)는 70평생동안 오직 수도원에서 오르간 등을 치며 교향곡 작곡에만 몰두했던 골수 카톨릭 신자였는데 느린 속도의 그의 교향곡처럼 그는 6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작곡가로 인정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바그너를 존경하여 바그너 풍을 답습했는데 오페라를 썼던 바그너와는 다르게 오직 순수 교향곡만을 위해 일생을 보냈다. 사람들이 부르크너를 좋아하는 것도 그러한 그의 우직한 순음악에 대한 동경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부르크너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늘 맑고 순수한 자연에 대한 동경… 어머니의 품… 피안으로 향하는 깊은 향수가 전해져 오는 것만 같다. 지난 주는 부르크너의 교향곡 8번만을 들으면서 지냈다. 교향곡의 길이는 약 85분. 결코 짧다고 볼 수 없는 곡이지만 유튜브에서 푸르트벵글러, 오토 클렘펠러, 카랴얀 같은 대가들의 연주들을 들으며 감동을 받기도 하고 또 비교하여 보기도 했다. 결론은 역시 조지 셀이나 카라얀 등으로 귀결되지만, 부르너 발터, 클렘펠러 등의 지휘도 나름 개성을 분출하는 명 연주들 중의 하나였다.
<이정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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