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고기 맨손으로 잡기 등 전국 122개 동물 프로그램, 유희 위해 생명에 고통 주는 체험
▶ 사실상 학대·살해…죄책감 없어
개·고양이만 반려동물 아냐…모든 생명 소중히 대우해야
지난해 12월 5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쪽방촌에 ‘동물을 위한 행동’ ‘동물구조 119’ ‘동네고양이 서울연대’ 단체 회원들이 길고양이를 위한 겨울집을 추가로 설치하려는 가운데 기존 겨울집 안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한호 기자]
2020 화천산천어축제 개막을 앞둔 지난 5일 강원 화천군 화천읍 화천천 일원에 미리 개장한 외국인 전용 낚시터에서 외국인 관광객이 낚시를 하며 추억을 만들고 있다. [연합]
지난해 7월 개장한 서울 영등포의 한 실내동물원의 모습. 관람객들이 새를 팔 위에 올려놓는 체험을 진행 중이다. [정진욱 동그람이 에디터]
지난 9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앞에서 열린 ‘화천 산천어 축제’ 동물학대 중단 촉구 기자회견에서 한 참석자가 발언하고 있다. 이들은 물고기를 맨손으로 잡는 행위가 동물학대라고 주장했다. [연합]
“인간이나 짐승이나 배고픈 건 똑같지.”
TV에서 길고양이를 학대하는 내용이 나오거나 내가 동네 고양이들 밥을 챙기다가 이웃들에게 한 소리 들으면 엄마가 늘 하는 말이다. 길고양이 문제는 동물의 문제라기보다 인간 사이의 문제이고, 인식 전환과 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하는,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는 문제지만 엄마의 한 문장이 핵심이다. 살기 위해 먹고, 먹이는 일이라는 것. 딸이 동물 관련 일을 하다 보니 딸에게 듣고 함께 동물 다큐멘터리를 많이 봐서 생긴 생각이기도 하지만 배를 곯아본 가난한 시절을 지나온 세대의 연민일 것이다. 그런 엄마가 몇 달 전 동생네 가족과 강원도로 여행을 다녀와서는 신나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운 좋게 축제 기간이었지 뭐냐. 오징어 맨손으로 잡기 행사가 있더라고.”
건성 듣다가 귀를 쫑긋 세웠다. 오징어가 안 잡혀서 무산됐는데 대신 다른 물고기로 대체해서 진행이 되었고 동생 가족도 참가했단다. 사람들이 물고기를 잡으려고 허둥대는 모습이 엄마 눈에는 꽤나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그건 물고기에게 두렵고 고통스러운 일이라며 내가 퉁을 놓자 잡혔으니 어차피 죽을 건데 뭐 어떠냐고 한다. 최근 각 지자체의 겨울 축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물고기 맨손으로 잡기 행사를 동물단체가 반대할 때 나오는 흔한 반응이다. 어차피 죽을 거! 길고양이의 배고픔에 동질감을 느꼈던 엄마는 그 감정을 물고기로는 확장하지 못했다. 엄마는 나이가 들면서 자주 이런 말을 한다. 죽는 건 무섭지 않은데 죽기 전의 고통이 두렵다고. 그러면서 물고기의 죽기 전 고통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어류도 고통을 느끼기 때문에 식용 목적이라고 해도 최대한 고통을 줄이려고 하는 게 세계적인 추세이다.
게다가 그 자리에는 어린 손자도 있었다. 식용을 위해서도 아니고 유희를 위해서 생명에게 고통을 주는 체험이 아이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을까. 인간과 동물은 다르고, 동물은 인간을 위한 수단이 되어도 된다고 익힐 것이다. 2017년 서울대 수의과대학 천명선 교수팀은 전국에서 열리는 86개 축제 중 129개 동물 관련 프로그램에 대해 조사한 결과를 내놓았는데 95%인 122개 프로그램이 동물에게 죽거나 죽음에 해당하는 고통, 스트레스를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부분 가족 단위로 찾는 축제임에도 불구하고 교육 프로그램은 전무했다.
미국 펜실베니아에도 비슷한 행사가 있었다. 목적은 소방서를 위한 기금 모음이지만 비둘기 사냥으로 유명한 가족 단위 축제였다. 여느 축제가 그렇듯 술과 먹을거리로 흥겨움이 더해지고 마침내 축제가 한껏 달아오르면 수십 개의 상자에 갇혀 있던 비둘기를 일제히 날려 보낸다. 그리고 그 순간 준비하고 있던 사수들이 비둘기를 향해서 일제히 총을 쏜다. 후드득 땅으로 떨어지는 수천 마리의 비둘기들. 비둘기를 쏘는 행사는 축제 분위기를 돋우는 이벤트가 되었고 죽어가는 비둘기를 무감각하게 바라보며 사람들은 웃고 마시고 떠든다.
이 축제의 가장 큰 문제는 아이들이 이런 광경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부모나 다른 구경꾼들의 격려에 힘입어 땅에 떨어진 다친 비둘기를 짓밟기도 했다. 이런 어린 사냥꾼들은 시간이 지나 비둘기 사냥을 즐기며 흥청거리는 어른이 될 것이다. 주최측은 비둘기 개체수 조절을 위한 행사라고 주장했지만 거짓말이다. 행사에 사용된 비둘기는 야생동물이 아니라 동물 판매상에게 사온 것이고, 운 좋게 총에 맞지 않은 비둘기는 도망가서 오히려 지역 비둘기 개체수를 증가시킬 수 있다. 한국 최대의 겨울 축제장이 된 화천 산천어 축제와 어찌도 이리 비슷한지. 산천어 축제의 산천어들은 전국 양식장에서 구입해온 것이고, 원래 화천은 산천어가 살지 않는 곳이어서 생태계의 교란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다행히 1999년 펜실베니아 고등 법원은 반학대 법률에 근거하여 비둘기 사냥꾼을 체포할 수 있는 법률을 제정하면서 오랜 전통의 비둘기 사냥 행사는 사라졌다.
오래된 전통이고, 재미있어서, 사람들이 몰려든다고 동물을 한낱 유희의 대상으로 하는 축제는 세상에 넘친다. 특히 가족이 함께 하는 자리에서 동물에게 고통을 주고 살생에 무감각해지는 경험을 아이에게 권하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취미로 다람쥐 사냥을 하는 사람에게 ‘월든’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당신이 장난 삼아 죽인 다람쥐는 진지하게 죽어간다”라고 했다. 아이들에게 동물에게 고통을 주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은 동물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아이를 위해서 더 중요하다. 그런 가르침을 통해 아이들은 동물도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살고자 하는 존재임을 배우게 된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다름’이 아니다. ‘다르지 않음’이다.
성별, 인종, 국적, 나이, 종교, 장애, 경제력, 성정체성 등 셀 수 없는 수많은 기준으로 나와 다른 남에 대한 학대와 폭력이 넘치는 세상이다. 약자, 소수자는 끊임없이 다르지 않음을 증명하면서 살아간다. 이런 상황 속에서 동물도 같은 생명이니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소수의 외침은 여전히 힘이 미약하지만 다음 세대에는 반드시 전해져야 하는 가치이고, 그러려면 어른들의 노력이 필요하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어른들의 기준을 아이들에게 넘겨줄 텐가.
좁은 공간에 야생동물을 가둬 전시하는 동물원이라는 곳이 그들에게 얼마나 혹독한 곳인지 그 현실이 알려지면서 최근 동물원 동물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 수준은 많이 높아졌다. 동물단체는 물론 동물을 도덕적 고려의 대상에 포함시키려 노력하는 개개인들 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동물원보다 더 참담한 실내 동물원, 체험 동물원 등은 오히려 우리의 생활공간 안으로 파고 들어오고 있다. 얼마 전 아이를 키우는 분을 만났는데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에서 실내 동물원에 현장 학습을 가길래 항의를 했더니 무시되었단다. 실내 동물원 가는 것을 아이들이 좋아하다보니 학부모들이 대부분 찬성했기 때문이라고. 순간의 즐거움을 위해서 동물의 고통을 무시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치지 못하는 어른들. 동물을 수단화해도 된다는 어른들의 생각은 고스란히 아이에게로 전달된다.
아동 문학가이자 교육자인 이오덕 선생님이 쓰신 글 중에 아이들의 동물에 관한 글쓰기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신 내용이 생각난다. 개식용에 관한 주제였는데 선생님은 개식용이 옳다 또는 틀리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문제는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어른들의 생각을 그대로 옮겨 쓴다는 것이다. 개식용을 찬성하는 아이들은 우리 전통이니까, 문화니까 괜찮다는 논리로 글을 썼다. 어른들의 생각이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얼마 전 미국의 8살 아이가 대형 사슴을 사냥한 후 피 흘리는 사슴 곁에서 찍은 사진이 온라인에 올라와 논란이 됐다. 미국은 주마다 다르지만 어린아이의 사냥을 규제하지 않고, 나이 제한이 없는 주도 있어서 합법이다. 그러나 자기에게 위협을 가하지 않은 무고한 생명을 죽인 경험은 어린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까. 대부분의 미국 가정이 그러하듯 가족처럼 여기는 반려견과 살텐데 반려견과 사슴은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할까. 언젠가 환경단체에서 주최한 강연에서 내 이야기가 끝나고 질문을 받는데 한 초등학생이 물었다. 집에서 닭을 키워서 자기는 닭을 반려동물이라고 생각하는데 친구들이 개와 고양이만 반려동물이라면서 놀렸다고 했다. 반려동물, 농장동물, 동물원 동물이라는 구분도 인간이 임의로 한 것이다. 타당한 기준도 없이 필요에 따라서 분류해 놓고, 죄책감 없이 학대하고 살해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이런 세상에서 아이들은 무엇을 배울까.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다름’이 아니라 ‘다르지 않음’이고, 모든 생명에게 다르지 않은, 합당한 대우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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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경 책공장 더불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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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학대 답은 어쩔수없이 강력한 법이 효과는가장 크다 말아무리해봐야 동물보다 못한인간은 말듣지않는다 더 강력한법 법 이필요하다
동물은 사람에게 온갖 도움이 되지만 어떤 사람은 동물에게 위험한 존재며 동물 만 도 못해 동물에게 해를 주는것도 못 봐 주겠는 사람들에게 더 큰 피해를주는 걸 보면서 동물만도 못하다 는 생각을 요즘 들어 더 많이 하게 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