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툼했던 일력이 4장만 남았건만 연말연시 기분이 나지 않는다. 한해의 결실을 바탕으로 새해를 설계하는 연말을 맞아 주변을 둘러보니 어둡다. 내 집 마련을 포기한 사람들에서 극한 대립으로 일관하는 정치권까지 불확실성과 갈등의 늪에 빠진 형국이다. 바깥으로 눈을 돌려도 마찬가지다. 외교·안보에서는 사방이 막혔다. 한반도는 평화보다 긴장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정부 입장에서 좌표를 잡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군(軍)은 더욱 그렇다. 최근과 같은 대치 국면이라면 9·19 군사합의도 지켜지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상황이 어려울수록 극복의 열매는 달다. 한국 현대사에서 겨울은 시련의 계절인 경우가 많았다. 1·4 후퇴에서 1973년의 제1차 석유 파동,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으로 연명했던 1997년의 외환위기까지 혹독했던 겨울은 다른 또 하나의 공통분모로 설명이 가능하다. 극복했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더 심한 경험을 겪었다. 13개 식민지 주의 연합체인 대륙연합은 1776년 말 붕괴 위기에 몰렸다. 조지 워싱턴 대륙군 총사령관이 사촌에게 ‘가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영국군은 항복 조건 검토에 들어갔다. 불과 몇천명으로 줄어든 대륙군 자체가 없어질 판이었으니까. 대륙군 병사들은 1년 복무 기간이 만료되는 연말이면 집으로 돌아갈 요량이었다. 싸우다 죽느니 영국의 식민지 신민으로 되돌아가는 게 낫다는 생각도 퍼졌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워싱턴 장군은 ‘크리스마스의 기습’이라는 단안을 내렸다. 대륙군 총사령관이라지만 당시 나이 44세, 군사 경험이라고는 20대 초중반에 프렌치·인디언 전쟁에 영국 민병대 중령으로 참전해 연패와 항복 기록밖에 없기 때문일까. 상대방은 그를 얕봤다. 그러나 그는 얼어붙은 강을 한밤중에 건너는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기습은 완벽한 성공을 거뒀다. 해를 넘겨 1월 초까지 이어진 두 차례 전투에도 승리, 신생 미국은 가까스로 되살아났다. 병사들이 제대를 연기하고 신병 모집이 수월해졌다. 결정적으로 관망하던 프랑스와 스페인·네덜란드 등 유럽의 국가들로부터 연합 제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륙군을 믿지 못했던 유럽 국가들의 직·간접 지원으로 독립전쟁은 장기전과 보급전 양상으로 바뀌고 미국은 끝내 승리를 따냈다.
워싱턴의 ‘크리스마스 작전’은 옛날 얘기에 머물지 않는다. 지난해 말 제임스 매티스 당시 미국 국방장관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해임을 통고받은 직후 장병들에게 보낸 지휘 서신에서 “미군은 이맘때면 명절에 근무하는 특권을 누린다”며 “명절 근무가 쉽지 않지만 워싱턴 장군이 1776년 델라웨어 강을 건넌 이래 미군에게는 늘 있었던 일”이라고 강조했다. “변화로 뒤덮인 세상에서도 전선을 지키기 위해 야전과 바다에서 명절과 밤에도 눈을 부릅뜨라”던 그의 마지막 지휘서신을 미군은 새로운 금과옥조로 여긴다.
밤에 눈을 부릅뜨지 않아 쇠망한 경우는 무수히 많다. 워싱턴 장군에게 당한 독일 헤센 용병부대는 기습 첩보를 입수하고도 새벽 경계를 게을리해 대패하고 말았다. 기묘한 사실은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한 영국군 병력의 25%를 차지했던 독일 용병들의 희생으로 헤센 영주는 누구보다 많은 수입을 올렸으나 지키지 못했다는 점이다.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새 영주는 독일 한복판에 위치한 헤센의 부흥을 꿈꿨지만 복무 연한이 25년인 용병국가(후에 12년으로 단축)라는 한계를 넘지 못한 채 몰락하고 말았다. 헤센 공국의 자금을 운용한 유대인 로스차일드 가문만 어부지리로 세계적인 부를 쌓았을 뿐이다.
‘크리스마스 작전’의 유산은 또 있다. 뉴욕은 지구촌에서 가장 활기찬 신년 축제가 열리는 도시로 손꼽힌다. 뉴욕 맨해튼의 타임스퀘어 중심가에 100만명 이상이 모이는 새해맞이 행사의 연원도 승전행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쿠데타와 국왕 등극, 3선을 거부해 국민들의 존경을 받은 워싱턴의 명망도 실은 위기의 한복판에서 형성된 것이다.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추위에도 전선을 지키는 우리 장병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신년에는 잘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매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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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홍우 서울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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