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윤)정렬 권사는 6.25 전쟁의 와중에서 큰 딸과 헤어진 한을 가슴에 품고 일평생을 자녀들과 남편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았다. 뒷줄 오른쪽에서 4번째 허정렬 권사, 5번째 허경삼 원로목사.
“엄마는 일제치하에 태어나 이웃마을 동갑청년과 결혼 후 두 딸을 낳고 시부모님과 함께 살던 중 6.25 전쟁으로 남한으로 피난와 일평생 남편과 가족을 위해 헌신만 하셨습니다.”
지난 8월30일 향년 95세로 숨진 허(윤)정렬 권사의 5녀 일레인 정씨는 “엄마의 생애는 북한 피난민들의 굴곡많은 생애를 다뤘던 영화 ‘국제시장’과 흡사하다”며 “북한에 큰 딸을 두고 배로 피난 나와서 서울에 미리 유학 와 있던 남편과 기적적으로 군산에서 재회하는 등 극적인 생애를 사셨다”고 회고했다.
1924년 황해도 송화군 문헌리에서 부친 윤병우 씨와 모친 조대녀 씨 사이에 2남1녀 가운데 둘째로 태어난 허 씨는 1942년 11월3일 황해도 장연에서 오렌지중앙교회 허경삼 원로목사와 결혼해 슬하에 미숙, 선숙(Sunny), 진숙(Jane), 신숙(Christine), 은숙(Elaine), 예숙(Carol), 아들 성열(Paul) 등 6녀1남을 두었으며 북한에 두고온 큰 딸은 생사를 확인할 길이 없다. 남편 허경삼 목사는 올해 95세로 건강한 편이다.
허 씨는 남편 허경삼 목사가 1947년 서울로 유학간 상태에서 6.25 전쟁이 터지면서 이산가족이 되었다.
1.4 후퇴때 허 씨가 탄 피난민 배가 거제도로 향하던 중 파선이 되어 군산에 배가 닿게 되었고 허 씨는 피난민 수용소에서 생활하던중 남편 허경삼씨가 피난민을 태운 배가 군산항에 도착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무작정 군산으로 내려와 헤매던 중 군산에서 아내와 부친 그리고 둘째 딸을 만나 극적인 재회를 했다.
그러나 그때 어머니와 큰 딸은 북한에서 나오지 못했다는 슬픈 소식을 듣게 되었다. 허 씨는 이후 가난한 전도사, 군목의 아내로 근무지를 따라 여기저기 옮겨 살아야했고 남편이 10년 공군군목(1955~1965년) 근무를 마치고 예편후 단신 미국 유학길(1965~1968년)에 오르자 남편 대신 6남매와 시아버지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이 와중에도 허 씨는 타고난 지혜와 억척스런 생활력으로 시아버지 봉양과 자녀들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남편이 유학을 마치고 돌아올 즈음엔 집에 TV, 피아노가 들어오고 딸들에게 피아노 레슨까지 시킬 정도로 가정형편이 나아졌다고 한다.
남편이 귀국 후 서울신학대학 교수로 10년 동안 재직(1968~1977년)할 때 오랜만에 가장 여유롭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간도 잠시..
1977년 12월 허경삼 목사가 신학교 시절부터 절친이던 고 임동선 목사가 시무하던 동양선교교회 초청으로 온 가족이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오면서 허 씨의 고달픈 삶은 다시 시작되었다.
그후 남편이 이민교회를 개척하자 허 씨는 이른 새벽부터 봉제공장에 나가 일하면서 집안살림을 돕고 자녀들은 물론 목회자의 사모로서 교회와 교인들을 돌보며 뒤늦게 박사공부를 하는 남편의 뒷바라지와 손주들이 태어난 후에는 손주들까지 돌보며 1인다역을 맡아 쉴새없이 가족을 위해 헌신했다.
남편 허경삼 목사의 은퇴후 정말 오랜만에 편하고 행복한 삶을 살았던 허 씨는 90세가 넘으면서 몸이 많이 쇠약해져 92세에 남편과 함께 양로호텔에 입주하게 된다. 지난 해 몇 번의 고비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거뜬히 일어났는 데 지난 8월25일 병원에 입원하고 95세를 한 달 앞둔 8월30일 너무나 평온한 모습으로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했다.
아들 폴 허 씨는 “임종 전 모든 자녀와 시애틀, 텍사스, 조지아, 그리고 멀리 브라질, 스위스 등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손주들이 병원침대에 모여서 한 명씩 엄마, 할머니에 대한 희생에 대한 감사 표현을 한 후 돌아가셨다” 며 “모든 후손들은 그 희생을 통해 감사하며 사랑하는 법을 깨닫고 살아가게 되었다”고 말했다.
또한 3녀 제인 임씨는 “77년을 해로한 95세의 남편과 북한에 두고 와 평생 한이 된 큰 딸외에 1남5녀의 자녀들 그리고 11명의 손주, 5명의 손녀, 4명의 증손녀들을 이 땅에 남겨둔 채 자녀들을 키우며 늘 불러주셨던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를 들으시며 영면하셨다”고 회고했다.
5녀 일레인 정씨는 “생전에 사치라곤 모르고 단 하루도 자신을 위한 삶은 없이 오직 한 평생을 ‘희생’ 으로만 사신 엄마였다”며 눈물지었다.
“엄마 사랑해요.. 엄마의 아들 딸이어서 행복했어요.. 엄마 보고 싶어요…천국에서 만나요…”
조사 - 손녀 카니 정저희 할머니는 운전도 못하시고, 영어도 할 줄 모르시고, 공부를 많이 못하셨지만,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퍼부어주셨습니다.
할아버지가 미국에 공부하러 가셔서 할머니 혼자 자식들을 키우시느라 많은 희생을 하셨습니다. 저희 할머니는 정말 열심히 일하시고 노력하셨습니다. 우리 가족 여자들이 기가 세다고 농담도 하지만 저희 할머니의 성실함과 생존을 위한 강한 정신이 저희 엄마와 이모들에게 본이 된 것 같아요.
어렸을 때는 우리 가족이 타주에 살아서 할머니와 함께 보낸 기억이 많이 없지만 조금 커서는 할머니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저희 동네에 사셨을 때 너무 좋았던 것은 약속없이 할머니 집에 찾아가서 뭐하고 계신지 볼 수 있는 것이었어요. 할머니는 TV를 보고 계시거나, 화초에 물을 주시거나, 성경책을 읽고 계시거나 요리를 하고 계셨습니다. 할머니는 저희에게 음식 해주시는 걸 너무 좋아하셨어요.
할머니 음식중 제일 맛있었던 것은 떡국, 빈대떡, 삼계탕 그리고 동치미였어요. 우리 할머니는 난초를 좋아했고, pink 색깔을 좋아했고, lipstick 을 사드리면 좋아 하셨어요.
저희랑 같이 사실 때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할머니께서 그 소식을 듣고 정말 좋아하며 그 뒤로 언제 결혼을 하는지 항상 물어 봤어요.
할머니는 저희를 위해 매일 이름 하나하나 부르시며 기도해주셨어요. Michelle 언니 하고 Gina 언니가 결혼한 후에 할머니의 제일 큰 기도제목은 제가 결혼하는 것이었습니다. 전 할머니께 꼭 제 결혼식 때 참석하셔서 결혼 행진 하는 것도 보시라고 약속도 받아냈었는 데 이젠 그 약속을 못지키시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이제 천국에서 아무 아픔없이 제 결혼식을 보시며 기뻐하실 것이라고 믿어요.
할머니, 그동안 수고 많이 했어요! 계속 저희 지켜봐 주시고 나중에 천국에서 만나요~ 사랑해요,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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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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