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승현 한양대 교수 구연 발표, 새 바이오마커 개발 길 열어
▶ 감각·지능 그대로 신경계만 퇴행…평균 61세 발생하고 3년 뒤 사망, 국내 환자 1700명·완치약 없어
김승현 한양대병원 신경과 교수가 호주 퍼스에서 열린 제30회 루게릭병/운동신경원병 국제 학술대회에서 한국 연구자로는 유일하게 구연 발표를 통해 환자 혈액으로 병 진행을 예측하는 바이오마커(biomarker) 개발 가능성을 열었다.
루게릭병 국제학술대회 호주서 열려희귀난치병인 루게릭병(근위축성 측삭경화증·ALS)은 유명인들이 얼음물을 뒤집어쓰는 ‘아이스버킷 챌린지’(2014년)로 널리 알려졌다. 루게릭병은 운동세포만 선택적으로 파괴하는 신경계 퇴행성 질환이다. 근육이 점점 마르고 힘이 빠지면서 식물인간처럼 변한다. 하지만 감각·지능·의식은 그대로 유지돼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병’으로 불린다.
루게릭병 원인은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면역 메커니즘, 유전적 원인, 신경미세섬유 기능 이상, 감염 등이 상호작용해 발병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동·서양 환자의 유전적 원인이 달라 서양 환자에게 가장 흔한 유전자(C9orf72)가 동양인에게서는 적게 발견된다. 특히 국내 환자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지난 4~6일 사흘간 호주 퍼스에서 35개국 1,5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제30회 루게릭병(ALS)/운동신경원병(MND) 국제학술대회’에서 루게릭병의 새로운 치료법과 최신 연구 동향이 발표됐다. 루게릭병 분야의 최고 권위를 가진 이 대회는 환자·가족·의료진이 같이 모여 토론하는 위성 모임(satellite meeting)도 있다.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불치병인 루게릭병 치료를 위해 줄기세포와 유전자를 이용한 새로운 치료법 등이 제시됐다. 특히 김승현 한양대병원 신경과 교수가 한국 연구자로는 유일하게 구연 발표를 통해 루게릭병 환자 혈액으로 병 진행을 예측하는 바이오마커(biomarker) 개발 가능성을 열어 갈채를 받았다.
◇팔다리 등 온몸의 힘 점점 빠져
노화로 인해 발생하는 퇴행성 관절염은 인공 관절로 병을 치료할 수 있다. 하지만 뇌가 노화하는 신경계 퇴행성 질환은 시간을 거슬러 뇌를 젊게 만들거나 젊은 뇌로 교체할 수 없는 결정적인 한계가 있다.
루게릭병도 노인성 치매(알츠하이머병)와 파킨슨병 같은 신경계 퇴행성 질환이다. 다만 루게릭병은 기억력과 운동조절을 담당하는 뇌신경에만 발생하는 알츠하이머병이나 파킨슨병과 달리 몸을 움직이게 만드는 뇌신경(운동신경)만 골라 퇴화시켜 온몸의 힘이 빠지면서 거의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루게릭병은 미국 뉴욕 양키스팀 4번 타자였던 루 게릭(1903~1941)이 이 병을 앓다가 사망하자 그를 기리기 위해 붙여진 병명이다. 블랙홀 이론으로 유명한 스티븐 호킹 박사와 스펀지밥 작가 스티븐 힐렌버그가 모두 이 병으로 지난해 사망하면서 재조명됐다.
루게릭병은 국내에서 매년 600여명의 환자가 새로 발생하고, 전체 환자는 1,700명 정도로 추정된다. 평균 61세에 병을 진단하고, 3년 정도 지나 사망에 이른다.(한양대병원 난치성세포치료센터) 병이 악화돼 음식을 삼키지 못하면 경피내시경하위루술(PEG·위에 구멍을 내고 관을 삽입해 음식을 넣을 수 있게 만드는 수술)을 통해 영양을 공급해야 진행을 늦출 수 있다.
가래가 많거나 호흡근력이 약해져 숨쉬기 어려우면 기관을 절개하고 인공호흡기를 착용해야 한다. 하지만 아직도 루게릭병 인지도는 낮은 편이다. 지난해 사기죄로 수감된 루게릭병 환자가 네 차례나 구속집행정지를 요청했지만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다 목숨을 잃기도 했다.
루게릭병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연구가 진행 중이지만 완치약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다만 병 진행을 늦추는 먹는 치료제(릴루졸)가 1990년에 처음 개발됐다. 2014년에 한양대병원 난치성세포치료센터(센터장 김승현 교수)와 코아스템이 공동 개발한 자가골수 유래 줄기세포치료제(뉴로나타-알)가 두 번째 치료제였다. 이어 2015년 일본의 미쓰비시 다나베가 뇌경색 치료제로 개발했던 에다라본(라디컷 주)을 루게릭병 치료제로 승인을 받았다. 이처럼 공인된 루게릭병 치료제는 릴루졸·뉴로나타-알·에다라본 등 3가지뿐이다. 현재 국내 건강보험 적용을 받는 약은 릴루졸뿐이다. 뉴로나타-알 및 에다라본은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환자에게 큰 부담이다. 그나마 다행히 의료실비보험(실손보험)은 적용되고 있다.
◇줄기세포·유전자 변이 등 새 치료법 제시
이번 호주 퍼스에서 열린 제30회 루게릭병/운동신경원병 국제 학술대회에서 눈길을 끈 발표는 미국 줄기세포 전문 기업 브레인스톰 세러퓨틱의 줄기세포 치료제(뉴로운, NurOwn)의 2상 임상시험 결과였다. 누워만 있던 루게릭병 환자가 뉴로운 임상시험 후 병상에서 일어서는 동영상이 공개돼 기대를 모은 바 있었다.
그러나 이번 발표는 2018년에 국제학술지(Annals of Neurology)에서 실린 한국의 뉴로나타-알 2상 임상시험 논문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특히 뉴로나타-알 임상시험 결과에서 제시된 결과와 같았다. 투여된 줄기세포는 곧 사라지지만 신경 염증반응 조절 효과가 유지된다는 것이 주요한 메커니즘으로 제시돼 기존 뉴로나타-알 연구결과와 동일했다. 게다가 브레인스톰 세러퓨틱이 제시한 1회 약값이 30만달러(3억5,000만원)로 3회 치료 시 10억원이 넘어 뉴로나타-알 약값(1회 치료비 3,000만원)의 10배가 넘는다.
또한 새로운 치료법으로 한국인 루게릭병 환자에게서 가장 흔히 발견되는 SOD1 유전자에 대한 유전자 치료제(ASO)의 임상시험(티모시 밀러 미국 워싱턴대 신경과 교수)이 발표됐다. 실패한 것으로 알려진 이부딜라스트(ibudilast) 임상시험의 추가 분석(수마 바부 미국 하버드대 신경과 교수)도 나왔다.
김승현 한양대병원 신경과 교수는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구연 발표를 통해 진행이 빠른 루게릭병 환자에게서 채취한 혈액으로 실제 뇌 미세아교세포 특징을 재현했다. 이로써 혈액만으로 루게릭병 진행을 예측할 수 있는 NCKAP1을 대변하는 miRNA-214-3p 등 새로운 바이오마커 개발 가능성을 열었다.
이 밖에 국내 연구진은 포스터 세션에서 14개 분야 300여 포스터 가운데 7개 분야 10개 포스터(한양대병원 7개, 서울대병원 3개)를 게재했다. 한편 인공지능·줄기세포를 통한 새로운 약제 연구법과 치료제 가능성이 있는 Cu-ATSM 등이 소개됐지만 임상시험을 준비하거나 진행 중인 상태에 불과했다.
◇아시아 환자에 특화된 치료법 연구 시도
루게릭병(ALS)/운동신경원병(MND) 국제학술대회의 남다른 특징은 세계 지역별 모임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유럽의 ENCALS, 미국의 NEALS, 호주와 아시아 지역 국가 연구자 모임인 ‘아·태지역 루게릭병 연구자 모임(PACTALS)’이 대표적이다.
이번 호주 퍼스에서 열린 제30회 국제학술대회에서도 60여명의 아·태 지역의 연구자가 모여 9번째 PACTALS 회의를 가졌다. 이번 회의에서는 한국 일본 중국 호주에서 진행 중인 루게릭병 연구와 아·태 지역 내 루게릭병 치료 현황 발표와 지역 임상연구를 촉진하기 위한 열띤 토론이 있었다.
특히 PACTALS 핵심 창립 회원인 김승현 한양대병원 신경과 교수가 발표한 루게릭병의 새 유전자인 아넥신A11(AnnexinA11) 연구가 기존 중국 연구의 부족한 점을 보완한 내용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김 교수는 “아·태 지역 내 다양한 인구 구성이 아프리카를 제외한 모든 인종을 아우르고 있다”며 “앞으로 아시아 지역의 유전자 연구가 전 세계를 아우를 수 있는 새로운 유전자를 발견하는데 공헌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PACTALS는 김 교수의 주도로 2018년 7월 서울에서 13개국 220명의 아·태 지역과 미국 석학뿐만 아니라 세계루게릭병협회를 포함한 각국 환우 단체가 참가해 첫 단독 학술대회를 가지면서 폭 넓은 교류를 진행한 바 있다. 내년 9월에는 일본 나고야에서 제2회 단독 학술대회가 열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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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익 의학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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