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세모에 옛 손님이 오셨다. 40여년 전, 산도 물도 낯설었던 미국 땅에 왔을 때, 유일하게 따뜻한 웃음을 건네주던 분이었다. 당시 미국이 인정 많고, 후하며, 다국적 이민들도 더불어 살 수 있는 큰 나라임을 이 분은 일깨워 주었다.
갓 태어난 우리 아이들이 그를 보며 자랐다. 아침마다 TV를 켜면 문을 열고 들어와 외투를 벗고 빨간 스웨터로 갈아 입으셨다. 그리고 운동화 끈을 매며 “내 이웃이 되어 줄래요?”라는 테마송을 미소 띠며 불렀다. 두 헝겊 장난감 친구들과 함께.
그 손님이 ‘미스터 로저스(Mr. Rogers)’였다. 70년대부터 30년간, 교육방송에서 어린이들의 멘토이자 내 마음의 이웃이었다. 그는 2003년에 세상 떠났지만, 탐 행크스가 미스터 로저스로 분해 ‘이웃과의 하루(A Day in the Neighborhood)’라는 최근 영화에 나온 것이다. 나는 장성한 두 아들을 데리고 영화 속으로 그를 만나러 갔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커는 ‘존재와 시간’(1927)에서 인간은 세상에 우연히 내던져진 피투성(被投性)의 존재라고 했다. 본적도, 만난 적도 없는 3인칭들로 가득 찬 이 세상에 내던져져 절대 고독과 불안감에 떠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불안했던 3인칭의 미국을 친근한 2인칭의 관계로 일깨워준 분이 ‘미스터 로저스’였다. 마치, 동네주민들이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3인칭에 불과했는데 어느 날, 이웃 아저씨가 꽃다발을 들고 환영해 줄 때 2인칭의 친근한 관계가 맺어지는 것과 같은 변화였다.
3인칭을 2인칭으로 바꾸는 근원은 사랑일 것이다. 이 세상 30억 인구는 타인들, 3인칭이다. 그런데 그 속에서 운명적으로 아내를 만나 눈빛만 보아도 가슴 뛰는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 2인칭, 사랑의 힘이었다. ‘미스터 로저스’는 우리 같은 이민자들, 특히 부부가 일하느라 TV앞에 버려둔 아이들을 2인칭 사랑으로 감싸준 고마운 스승이었다.
또 하나, 그는 내게 ‘의미형 인간’으로 사는 삶의 긍지를 심어주었다. 지금 세상은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재미형 인간’들이 뜨고 있다. 소소하고 확실한 지금의 행복을 누리려는 소위, 소확행(小確幸)이나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족들이다.
그러나 ‘의미형 인간’은 지루한 소명을 묵묵히 실천하고, 일상의 어려움을 잘 견뎌내며, 고난에도 의미가 있음을 믿는 사람들이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일에 집중하고, 실패를 긍정적인 도전으로 받아들이며, 남을 배려하고, 내일의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려는 형이다.
‘미스터 로저스’는 ‘의미형 인간’의 본을 보여주었다. 그런 덕에 그를 보며 자란 내 자식들도 몸과 마음을 소중히 여기는 절제의 삶, 남을 돌아보는 배려의 삶의 소중함을 깨우친 것이 감사하다.
영화에서 로저스 아저씨는 뜻밖의 손님을 소개했다. 그를 취재하러 온 ‘에스콰이어’지의 보글 기자였다. 그는 겉보기엔 전도가 유망한 청년이었지만 속엔 남모를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어릴 때 자식들과 병든 어머니를 버리고 딴 살림을 차린 생부에 대한 증오가 들끓고 있었다.
니체가 말한 ‘르상티망’, 과거의 원망과 상처가 꽉 찬 사람이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외면하고 있었다. 그 내면을 금세 알아 챈 ‘미스터 로저스’는 인터뷰를 시작하려는 젊은 기자에게 잠시 침묵하자고 말했다.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 침묵 속에서 로저스 아저씨의 조용한 음성을 들었다. “새로 태어난 당신의 아기가 사랑스럽지요? 새 생명을 보면 나는 인간이 태어난 이유가 우연이 아니라, 어떤 필연적인 인연, 운명적인 섭리라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는 불완전한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운명적인 인연을 맺으며 성숙해 간다. 3인칭의 타인들 속에서 2인칭의 관계를 맺으며 사랑과 용서를 배운다.
보글 기자는 ‘미스터 로저스’를 주제로 자신이 어떻게 그를 통해 평생의 상처를 치유받았는지를 커버스토리로 다루었다. 그 달 에스콰이어지는 최고의 부수를 찍어냈다.
올 성탄절에도 아기 예수는 ‘르상티망’에서 헤매는 불완전한 나의 2인칭으로 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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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봉 수필가 Enviro 엔지니어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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