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기원전 4년 팔레스타인 북부인 갈릴리아 지역의 나사렛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과거로 부터 비옥한 지대로 명성이 높았다. 반면에 농민 소작인들은 가난하기로 명성이 높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로마의 식민지로 경제적 수탈을 당했기 때문이다. 물론 지주는 로마 정권에 아부하는 유대 지도층과 부유층이었다.
갈릴리아 지방이 민중 봉기의 중심이 되고 갈릴리아 사람이 반란자로 취급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주둔 총독은 징세를 목적으로 호구조사를 실시했는데 이에 반발한 젤롯 당에 소속된 유다는 민중봉기를 일으켜 반발했다. 이로인해 2천여명이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예수는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세례요한은 갈릴리아 봉건주 안티파스에 의해 반로마 선동의 정치범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이런 곳을 예수가 제자들과 가서 민중과 함께 했다는 것은 정치적 시위로 볼 수 있다.
예루살렘은 유대의 중심지이고, 왕조의 중심지이다. 또한 성전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야훼는 히브리인을 해방시킨 광야의 하나님이다. 유대 제사장들은 천지를 창조하고 관장하는 하나님 성전을 세워 감금시킴으로서 그들의 전유물로 취급시켜 버린다.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순례를 해야 했고 순례에는 당연히 재산의 일부를 바쳐야만 했다. 물론 여기서 받쳐진 순례 지참금은 로마 정권에게도 바쳐졌다. 이를 보다 못한 예수는 “저들이 예루살렘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다”고 폭로하고 다니면서 “성전을 헐어 버리겠다”고 했다.
불의를 보면 분노하고 거친 말도 불사하는 성격 탓에 바리새인들에게 미움을 사게되어 비판적인 예수를 위험 인물로 본 유대교의 대제사장들은 사회질서를 뒤흔들었다는 죄목으로 유대인들의 자치기구인 산헤드린 의회에 넘겨 본티오 빌라도 총독의 명에 의해 두명의 강도들과 함께 잔인한 십자가형에 처하게 만든다.
결국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마지막 말과 더불어 비명을 지르고 운명한다.
그후 그를 사랑하고 따르던 제자들에 의해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었고 그 과정에서 조금씩 전하는 사람의 생각과 해석이 첨가되었다. 전승을 타고 예수는 어느새 민중의 영웅이 되었으며 그를 흠모하고 따르던 사람들의 모임은 여러 동아리 형태를 갖추게 되어 초대교회가 탄생된 것이다. 예수가 시작한 사랑 실천운동의 복음활동이 그가 죽은 뒤 불과 20년도 지나지 않아서 유대인의 혈통과 로마인의 시민권을 아울러 갖고 있던 사도 바울에 의해 예수는 유대 전통과 희랍 철학에 근거하여 새롭게 해석되어지고 수사학과 논리학을 접한 그의 세련된 문체와 논리 정연한 글은 사람들의 마음을 점차로 사로 잡게 되었다.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으며 현실은 어두움으로 가득차 있지만 저 하늘 나라에서 모든 고통이 사라질 것이라는 그의 해석은 가난하고 힘없고 체제에 눌리고 착취당하며 살아가던 민중에게는 최상의 복음(good news)이 되었다.
바울에 의하면 예수의 죽음은 억울하고 안타까운 비극이 아니라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구속사의 정점으로 이해되었다. 이미 신의 아들로 고백되기 시작했다.
예수는 이제 사람들이 따라야 할 대상이 아니라 믿어야 할 신이 되어 있었다. 그를 믿기만 하면 모든 죄가 사멸되고 구원을 받으며 죽음에서 부활하여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후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교회는 하느님과 예수를 동격으로 규정하는 삼위일체를 논의하고, 유대교와 차별 하기 위해 367년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우스가 떠돌던 책자들 가운데 27권을 선정해 신약성경으로 확정한 후, 381년 콘시티노풀 공의회에서 삼위일체론을 받아들여 마침내 신의 아들을 넘어 신 자체가 되었다.
예수가 가르치고 행동으로 보여 준 복음은 불의한 세계를 개혁하고 모두가 함께 잘사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던 대중 운동이다. 예수는 로마의 폭정에서 벗어나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이 자유를 얻고 행복 한 삶을 누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기 위해 민중과 더불어 살다간 휴머니스트였다. 예수는 어떤 이념이나 교리도 인간을 억누르고 통제할 권리가 없다며 자유와 해방의 권리를 선언하며 정의와 평화를 위해 기득권에 저항한 로마시대 대중 혁명가였을 뿐이다.
예수에 대한 재해석은 이미 기독교의 본거지인 유럽에서 이삼백 년 전부터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독일의 신학자 본 훼퍼는 “예수는 새로운 종교를 원하지 않았다. 새로운 삶을 원했을 뿐이다"라고 하여 교회가 예수의 따뜻한 인류애 정신을 배타적 교리로 만들고 종교조직을 유지 발전시킨 것은 예수의 뜻을 거스른 잘못된 선택이라고 보았다.
문제는 배타와 독선에 빠진 미국의 근본주의 교회와 한국의 주류 개신교는 여전히 이천 년 전 바울의 이론에서 한 발자국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붙들고 있던 모든 배타적인 교리와 전통을 모두 내려 놓고 정직하게 예수를 재탐구하여 모든 종교들과 화합하고 상생할 수 있는 또한, 현대 과학이 납득할 수 있는 합리적인 교리로 재구성해야 한다. 니이체가 말한대로 “기독교의 본질은 행에 있지, 믿음에 있는 것이 아니다.”
<
이형국 / 정치 철학자, VA>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