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엄마는 몸이 많이 좋지 않았다. 초등학교 일학년 때 엄마를 그리라고 했을 때 난 이쁜 원피스를 입고 이불을 덮고 누워 계신 엄마를 그렸다. 엄마는 아이 다섯과 무섭고 얼음만큼 차가운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미국 오기 전까지 우리 식구는 한국에서 중산층 이상이었다. 집에는 가사도우미가 있었고 운전사 아저씨가 여름휴가를 같이 가곤 했다. 그렇게 좋은 시절도 있었지만 그런 것들은 다 한국에 두고 미국에 이민을 왔다. 부모님이 다섯 명의 자녀를 데리고 말도 안 통하는 미국을 택한 이유는 한국이 불안하다고 생각해서였다.
이민을 결정하고 부모님은 우리 형제 다섯을 앉히고 미국에 간다고 말씀하셨다. 그때 난 아버지의 눈물을 처음 봤다. 그때 아버지는 50대셨고 어머니는 40대 중반이셨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서 아이 다섯을 데리고 말도 통하지 않는 미국행을 마음먹으셨을까? 지금 생각하면 대단한 용기였다.
거기다 당시만 해도 한국 돈은 말도 안 되게 가치가 낮았다. 하지만 그 돈마저 없었다. 엄마는 한국에서 일 한 번 안 하셨지만, 미국 와서는 공장가서 돈을 벌었고, 식구들 먹이느라 매일같이 음식을 하셨다. 그때 난 처음으로 엄마가 음식을 잘한다는 걸 알았다. 주말이 되면 작은집 식구들과 매주 갈비 파티를 열었다. 거의 20명이 주말마다 모여 갈비를 구우며 미국 생활에 적응해갔다.
설이 되면 40명이 넘는 인원을 먹이기 위해 한 달 전부터 김치를 담고, 만두를 만들어 얼리고 녹두 빈대떡을 만드셨다. 미국에 오래 산 아버지의 사촌 식구들까지 다 와서 즐겼기에 정말 많은 음식이 필요했다. 그 많은 식구들이 아침, 점심 먹고도 남아서 싸 갈 수 있을 만큼 엄마는 많은 음식을 준비하시곤 했다. 아침 먹고 설거지하고, 점심 준비 그리고 설거지를 하던 때 엄마는 마치 군대의 총 지휘관 같았다.
40대 후반에 미국 와 운전할 용기를 못 내시던 엄마는 아이들과 아버지에게 라이드를 의지하셨다. 그렇게 10년쯤 지내다 50대 중반이 되어 아이들이 다 커서 시간 없다며 라이드를 못 해준다고 할 때쯤 엄마는 운전을 배우기로 마음먹으셨다. 열심히 배워 프리웨이는 못 타도 교회, 마켓 그리고 친구들과의 커피 타임에 참석할 정도의 실력은 갖추셨다. 운전 배운 게 50대 중반,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을까?
세월이 많이 흘러 엄마는 지금 80대 후반의 할머니가 되셨다. 얼마 전 생신을 한 달쯤 앞둔 엄마가 DMV에 가셔야 한다고 걱정스럽게 말씀하셨다. 면허시험을 다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5년마다 필기시험을 통과해야 하는데 이제는 표지판 테스트(sign Test)도 추가됐단다.
엄마는 매일 열심히 공부해 필기에서는 2개밖에 안 틀렸지만, 표지판 테스트에서 4개를 틀려 불합격하셨다. 표지판 테스트는 그림에 ‘Narrow Road’ ‘The End’라고 적힌 것이 많았는데, 나조차 한 번도 못 본 것들이었다. 영어만 알면 힘든 건 아니지만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 엄마는 많이 힘들어하셨다. 조급하셨던지 혼자서 로컬로 30분 운전하셔서 다시 시험 보고 낙방하기를 반복, 3번째 떨어지시고는 “난 이제 운전 안 하련다”느니, “이제는 집에만 있어야겠다”는 둥 “이 나이에 더 못하겠다”며 절망스러운 말을 하기 시작하셨다. 그동안 남들에게 부탁하지 않고 혼자서 운전해서 교회도 가고, 마켓도 가셨는데 그 작은 자유를 포기하시려니 많이 슬프셨던 것이다.
다행히 엄마는 일주일 뒤 큰 언니의 과외 덕에 좋은 성적으로 합격하셨다. 이제는 이게 마지막이란 걸 엄마는 알고 계시는 것 같다. 5년 뒤면 엄마는 아흔 살 초반, 그때까지도 운전하시고 건강하게 음식 만들고 그러실 수 있을까?
열심히 사신 울엄마, 한국에 있었으면 사모님 소리 들으며 우아하게 사셨을 텐데…. 다섯이나 되는 아이들 데리고 미국까지 와 대학 공부 다 시켜 많은 돈은 못 벌어도 각자 밥벌이는 하고 살 수 있게 해주셨다.
80대 노인이 돼서도 아직 자식들 걱정에 매일 아침 식구들을 위해 무릎 꿇고 기도하시는 울엄마다. 내가 엄마 나이가 됐을 때 엄마만큼 용기 있게 살 수 있을까? 그렇게 되기 위해 난 뭘 해야 할까? 오늘도 엄마의 용기와 사랑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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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김 현대자동차 미국법인 마케팅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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