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프리카 혹돼지 숙주 바이러스 전염률 10% 이하 전염 속도 느려
인간의 ‘도움’없이는 확산 불가능
▶ 유럽에 열병 상륙했을 때 원인도 비행기·선박 등의 오염된 음식들
한반도 전염 경로 아직 모르지만 병들어 죽고 인간에 포획돼 죽고 살고 싶을 뿐인 멧돼지는 억울해
야생멧돼지. ●사진=국립생물자원관
아메리카대륙에서 서식하는 멧돼지 페카리.
영화 ‘라이온킹’의 품바로 유명한 혹돼지. 주로 아프리카에 서식한다. [국립생물자원관 제공]
황금돼지해로 불린 기해년(己亥年)이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십이간지의 마지막 동물인 돼지는 순서를 정하는 달리기 경주에서 꼴찌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돼지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굼뜨지도 게으르지도 않습니다. 손오공에 나오는 역동적인 저팔계가 실제 돼지와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죠. 그런데 황금돼지해에 돼지가 수난을 겪고 있습니다.
생물다양성 높이는 긍정적 역할도
우리가 즐겨 먹는 돼지고기는 여러 품종이 있습니다. 제주 흑돼지도 있고 스페인의 이베리코 돼지도 있죠. 이중 요크셔, 듀록 등이 우리나라에서 많이 키우는 돼지의 품종입니다. 흔히 떠올리는 털이 적고 분홍색인 돼지와 달리 야생에는 뻣뻣한 털로 덮인 짙은 회색의 멧돼지도 있습니다. 어두운 색깔의 뻣뻣한 털을 가진 탓에 집돼지에 비해 위협적인 느낌을 주지만 줄무늬를 가진 어린 멧돼지는 어떤 동물의 새끼보다 귀엽습니다. 비슷한 듯 다른 듯하지만, 멧돼지와 집돼지는 ‘수스 스크로파(Sus scrofa)’라는 학명을 쓰는 같은 종입니다. 오래 전 우리의 조상이 멧돼지를 키우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나 지금의 집돼지가 된 것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동남아시아, 극동아시아, 터키 등에서 따로따로 멧돼지를 키워 집돼지로 만들어냈다는 사실입니다.
아메리카대륙에는 멧돼지보다 매우 작은 페카리(Peccary)라는 야생돼지가 있고 아프리카에는 영화 ’라이온킹’의 품바로 유명한 혹돼지(Warthog), 인도네시아의 섬에는 윗송곳니가 위로 솟구쳐 자라는 바비루사(Babirusa)라는 돼지류도 있습니다. 하지만 멧돼지는 우리나라를 포함한 아시아 일대와 유럽, 북아프리카가 원산지로 돼지 종류 중에선 가장 넓은 분포를 가진 성공한 동물입니다. 멧돼지는 원산지인 유라시아 지역뿐만 아니라 사람에 의해 옮겨져 호주와 미국에서도 번식에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광활한 미국 남부와 호주대륙에서 멧돼지는 크게 번성했습니다. 불행히도 이들 나라에서 멧돼지는 우리나라의 뉴트리아처럼 생태계를 교란하는 외래종으로 악명이 높습니다. 호주와 미국에서는 독약이나 호르몬까지 이용하는 등 멧돼지를 제거하기 위한 다양한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잡식성으로 여러 먹이에 잘 적응돼 있고 다양한 서식지에서 살 수 있는 멧돼지는 유라시아 전역에 비교적 흔하게 보이는 야생동물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서울을 포함한 대부분 지역 산야에 멧돼지가 살고 있습니다. 등산 중에 쉽게 볼 수 있는 멧돼지의 흔적은 삽을 파헤친 듯 땅을 뒤집어 놓은 루팅(rooting)이라는 행동의 흔적입니다. 땅속의 지렁이나 나무뿌리 등의 먹이를 찾기 위해 땅을 헤집는 행동이죠. 이러한 행동 탓에 토양의 화학적, 물리학적 특성이 바뀌게 되고 자연스레 다양한 서식지 조건을 만들어 생물다양성을 높여줍니다. 또한 털에 식물의 씨앗을 묻힌 채로 돌아다녀서 식물 종을 넓게 퍼트리기도 합니다.
조금만 눈여겨보면 발자국이나 배설물 등도 볼 수 있지만 이보다 더 눈에 띄는 흔적은 비빔목이라 불리는 나무입니다. 멧돼지는 송진이 나오는 침엽수를 비빔목으로 자주 이용하는데 나무의 수피가 벗겨져 있어 눈에 확연히 드러납니다. 진흙 목욕을 좋아하는 탓에 습지나 물이 남아있는 산지의 논에서는 멧돼지의 목욕 흔적과 발자국도 자주 보입니다. 멧돼지는 잡식성이지만 과일, 씨앗, 뿌리, 도토리, 덩이줄기 등 식물성 먹이가 90% 이상을 차지합니다. 11월 말에서 12월 초에 주로 교미를 하고 4개월의 임신 기간을 가지는 멧돼지는 한 배에 네 마리에서 열 마리의 새끼를 낳지만, 새끼를 잃으면 일 년에 두 번이나 번식할 수 있습니다. 같은 우제류 동물인 양, 염소나 소에 비해 많은 새끼를 낳습니다. 적은 수의 자식 양육에 큰 노력을 들이기보다는 많이 낳고 양육에 적은 노력을 들이는 전략을 사용합니다. 그만큼 새끼돼지의 사망률이 높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100마리가 넘는 멧돼지의 집단생활도 확인되지만, 일반적으로 수퇘지는 단독생활을 하고 한 마리 또는 여러 마리의 암퇘지들이 자신의 새끼들과 한 집단을 이루어서 사는 것이 자주 보입니다.
멧돼지 줄이려면 마릿수보다 밀도 고려해야수스 스크로파 코레아누스(Sus scrofa coreanus)로 아종명에 ‘코레아(corea)’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멧돼지는 우리의 조상과 함께 오랜 시간을 한반도에서 같이 살아온 자생동물입니다. 여러 멧돼지의 아종 중 가장 큰 아종의 하나로 알려져 왔습니다. 유전학적으로 시베리아의 멧돼지보다는 동남아나 일본의 멧돼지와 가까워, 해수면이 낮았던 빙하기에 건너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우리의 자생동물이기는 하지만 분묘를 파헤치거나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 까닭에 유해야생동물로 지정돼 매년 많은 수가 포획되고 있습니다.
한정된 땅을 사람과 야생동물이 나누어 쓰다 보니 당연히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경작지는 야생 멧돼지의 서식지인 산속까지 넓어지고 야생동물에게 맛난 농작물은 뿌리칠 수 없는 유혹입니다. 사람과 야생동물의 다툼에서는 대부분 야생동물이 지고 맙니다. 매년 수만 마리의 멧돼지가 유해조수라는 낙인 아래 사라지고 있습니다.
돼지는 복(福)이나 재물을 의미하는 동물로 돼지꿈을 꾸면 복권을 사지만, 멧돼지는 언제부터인지 흉포한 맹수 이미지의 유해동물로 자리 잡았습니다. 특히 지금처럼 늦가을에서 겨울에 이르는 시기에는 멧돼지의 출몰이 잦아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기 일쑤입니다.
사실 사람과 동물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사람이 집, 직장 등 정해진 곳만을 주로 쳇바퀴 돌 듯 살아가는 것처럼 동물들도 정해진 행동반경을 벗어나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닙니다. 사람이 성인이 돼 일자리나 배우자를 찾아 고향을 떠나듯, 멧돼지도 독립할 시기나 번식기 등에는 기존의 서식지를 벗어나 새로운 서식지를 찾아 떠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급작스러운 이동을 일으키는 것은 수렵 등으로 직접적인 위협에 처했을 때입니다. 이런 경우 장거리로 피신해 무리하게 도심에도 나타나고 큰 강이나 바다에서 헤엄까지 치며 이동을 합니다. 수영을 잘하는 동물이기는 하지만 망망대해를 즐기기 위해서 헤엄치지는 않습니다.
사실 지금은 너무나 흔해서 유해조수로 포획되고 있지만 서울에 멧돼지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중반이 넘어서부터입니다. 1900년대 초반에 제주도의 멧돼지는 멸종했고 지금 제주 멧돼지는 제주도의 토종이 아닌 육지에서 건너간, 엄밀히 말하면 외래동물입니다. 내륙의 경우에도 일제강점기와 6ㆍ25 전쟁 등을 겪으면서 멧돼지가 좋아하는 산림서식지는 대부분 파괴됐고 민둥산에서는 멧돼지가 살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적극적인 산림녹화 운동으로 산에는 녹음이 우거졌고 좋아진 서식지에서 우리나라 멧돼지는 급격하게 늘었습니다. 열 평짜리 집보다는 스무 평짜리 집에서 더 많은 가족이 살 수 있듯이 자연생태계도 야생동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를 최대수용력이라 부르는데, 야생동물은 자신을 품어줄 수 있는 최대수용력 안에서 일정한 밀도를 유지하고 살아갑니다. 밀도가 높아져서 최대수용력을 넘어서면 먹이나 보금자리의 경쟁에 도태돼 여분의 개체는 자연스레 사라지고, 최대수용력을 밑돌 때면 남는 자원을 이용해 급속하게 증가해 빈 공간을 채우게 됩니다.
야생동물관리학에서는 이러한 최대수용력을 이용해 어느 정도의 야생동물을 이용할 수 있는가를 결정합니다. 일반적인 경우에는 최대수용력의 반에서 3분의 2정도까지는 잡아내도 금세 회복합니다. 많은 수의 멧돼지를 유해조수 구제 등으로 포획해도 멧돼지가 줄지 않은 것이 이러한 이유입니다. 적극적인 멧돼지 포획의 결과, 멧돼지의 마릿수가 줄어들기보다 멧돼지의 평균연령만 낮아졌다고 국제자연보전연맹 IUCN은 말합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많은 수를 잡아냈을 때는 개체 수의 회복이 어렵고 절멸에 이르기도 합니다. 이를 알리 효과(Alliee effect)라고 하는데, 야생동물의 밀도가 낮아지면 교미 상대를 만나기 어렵고 집단생활을 하는 동물의 경우 협동을 통한 방어나 먹이활동 등의 제약에 따라 개체군이 증가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아프리카돼지열병의 원흉? 멧돼지도 피해자황금돼지해인 올해는 우리나라 멧돼지에게는 가장 끔찍한 해가 됐습니다. 지난 9월 아프리카돼지열병이 우리나라에 상륙했습니다. 이름처럼 본래 아프리카에 서식하는 혹돼지에 흔한 병인데 혹돼지와 아프리카돼지열병 바이러스는 오랜 시간 같이 살아온 탓에 바이러스는 숙주인 혹돼지를 죽이지 않고 대대손손 번성해왔습니다. 이러한 아프리카돼지열병 바이러스가 새로운 숙주인 집돼지와 멧돼지에게는 아주 치명적으로 이병에 걸린 돼지는 빠른 시간 내에 대부분 죽습니다. 숙주인 돼지도 죽음이라는 최악의 상황에 놓이니 좋지 않지만, 바이러스 입장에서도 병을 퍼트리기 전에 숙주가 죽는 탓에 썩 좋지는 않습니다. 알려진 전염률은 10%에도 이르지 못하고 자연상태의 전파속도도 1년에 8~17㎞에 불과해 다른 전염병에 비해 매우 느립니다.
사람들은 멧돼지가 이 병을 옮겼다고 비난합니다. 하지만 1957년 아프리카돼지열병이 서유럽에 처음 상륙했을 때도 비행기의 오염된 기내식으로 시작됐다고 알려져 있고, 2007년 동유럽 조지아의 상륙한 아프리카돼지열병은 흑해에 정박한 배에서 버려진 오염된 음식이 원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아시아에는 2018년 중국을 시작으로 우리나라와 심지어 섬나라인 필리핀을 포함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필리핀의 경우에도 중국에서 들어온 오염된 돼지고기가 원인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아프리카돼지열병이 들어온 확실한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어떤 경로가 되었든 직간접적인 사람의 도움 없이는 먼 아프리카의 바이러스가 비행기로 열 시간이 넘게 걸리는 한반도에 들어오기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아프리카돼지열병의 매개체로 지목돼 많은 수의 멧돼지가 포획되고 있지만, 이 불행한 동물 또한 아프리카돼지열병을 옮기는 원흉이라기보다는 피해자에 가깝습니다. 어느 날, 사람이 가져온 ‘걸리면 죽는 질병’에 걸렸고 이 병으로 죽는 것도 억울한데 병을 옮긴다며 많은 수를 죽이고 있으니, 멧돼지에게는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농작물을 해치는 유해조수, 아프리카돼지열병의 매개체, 포획을 피해 도망치면 도심에 출몰한 맹수, 무엇을 해도 비난 받는 멧돼지. 돼지해인 올해 한 번쯤은 멧돼지의 입장에서 바라봐 줄 아량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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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석 국립생물자원관 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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