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중턱을 넘어서니 바람이 불 때마다 바싹 마른 잎들이 낙엽비가 되어 내린다. 이제는 가지에 달린 잎보다 땅에 뒹구는 낙엽이 훨씬 많은 걸 보니 나무들의 월동 준비가 거의 끝난 듯하다.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수분을 뿌리로 내리고 앙상한 몸뚱이를 부여안고 숨 고르기를 하며 봄을 기다리는 나무에게 인내를 배운다.
11월 초에 일광 절약 시간제가 끝나면 급격히 줄어든 햇빛 양때문에 뇌의 행복물질인 세로토닌 생성이 줄어들어 슬픔과 우울감이 증가한다. 그래서 11월부터 연말을 지내고 봄이 올 때까지, 정신과 클리닉에 상담 요청이 늘어 바빠진다. 지난 10년을 돌아보니 매년 그 추세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 겨울에는 커튼을 활짝 열어 햇빛을 많이 쬐도록 애쓰고, 가능하면 낮 시간에 밖에 나가 산책을 하거나 하늘 향해 두 팔 벌린 나무처럼 광합성 하는 시간 갖기를 권한다.
몸과 마음이 함께 추워지는 이맘 때면 ‘가을을 탄다’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줄어든 햇빛의 양뿐만 아니라, 마른 낙엽과 앙상한 가지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상실감과 인생의 무상함이 우리 마음을 쓸쓸하고 고독하게 만든다. 머리로는 자연의 섭리를 알고 있지만, 눈에 보이던 것들이 공간에서 하나씩 사라지는 경험은 마음에 상실의 슬픔과 허무함을 느끼게 한다.
산책 중에 흩날리는 낙엽과 앙상한 나무를 바라보며 쓸쓸함에 잠겨 있는데, 가지 끝에 매달린 빨간 산수유 열매가 문득 눈에 띈다. 순간 낙엽에만 넋이 나가 열매를 못 본 내 모습이 보인다. 봄에는 예쁜 꽃을 선물하고, 여름 내내 따가운 햇빛과 비를 견디다가 가을에 자랑스러운 열매를 맺었는데, 그런 수고와 열매는 못 보고 잃은 것만 보고 있는 내게 열매가 ‘나도 좀 봐줘요’라고 말하는 것 같다.
한해를 돌아보니 잘못했던 일들이 먼저 떠올라 마음이 무겁다. 작은 오해로 멀어지거나 깨어진 관계들, 정성과 마음을 쏟았는데 실패로 끝난 일들, 선한 뜻으로 시작했는데 씁쓸히 끝난 일들… 생각이 감정을 만든다더니, 이런 일들을 차례로 떠올리니 마음이 점점 무거워지고 우울해지다가 사는 게 허무해진다. 순간 ‘아차…’하며 생각과 감정을 알아채고 새로운 관점으로 한 해를 돌아보니, 올해 새로이 만난 소중하고 귀한 만남들, 크고 작은 잘한 일들이 떠올라 마음이 따뜻해진다.
뇌과학자들은 뇌가 ‘부정 편향(negative bias)적 속성’이 있다고 한다. 부정적인 신호에 민감할 수록 생존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우리 뇌는 긍정적 정보 보다는 부정적 정보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열매보다는 낙엽이 눈에 먼저 들어오고, 자녀의 성적표의 ‘A’ 6개보다 ‘B’ 1개가 눈에 먼저 띄고, 99가지 잘한 일보다 한가지 실패에 돋보기를 들이대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이다.
낙엽을 볼 것인지, 열매를 볼 것인지는 이제 나의 선택이다. 선택이론 학자들은 ‘개인의 모든 행동은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고 불행과 갈등을 비롯하여 우리의 모든 것이 우리 자신에 의해서 선택된 것’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할 수 없어서’ 또는 ‘저 사람이 날 힘들게 해서’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다른 사람은 우리를 불행하거나 비참하게 느끼게 할 수 없고, 또한 행복하게 할 수도 없다. 오로지 나만 어떤 정보를 뇌에 입력하고 어떻게 해석하는지, 무엇을 느끼고 어떤 행동을 할 건지를 내가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이다.
포로 수용소에 갇혔던 유태인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뺏을 수 없다’라고 한다. 가슴에 새겨 두고 힘들 때마다 자주 떠올리는 말이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불평하며 그 사람을 바꾸려고 애쓰는 것은 내가 가진 ‘선택’의 힘과 자유를 포기하고 다른 사람 손에 내 삶을 맡기는 것이다. 이제는 ‘What can I do?’에 집중하여 지금 나의 형편과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뭘까?’ 고심하는 것이 내가 내 삶의 주인으로 사는 것이리라 믿는다.
4monicalee@gmail.com
<모니카 이 / 심리 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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