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리·털 다양해 학명은 ‘다모류’ 이름처럼 갯벌서만 살지 않고 바위·모랫바닥·심해 열수구까지 바다 거의 모든 곳에 살고 있어
▶ 생물자원 선점 전쟁 시작된 상황, 약품·첨가제 등 원료 잇따라 추출
각국, 갯지렁이의 가치 재평가, 뒤처진 연구 활성화 위해 관심을
여러분은 갯지렁이라고 하면 무엇이 제일 먼저 떠오르시나요? 대부분 낚시 미끼로 주로 쓰이는 참갯지렁이 종류를 제일 먼저 떠올릴 것입니다. 실제로 참갯지렁이류는 우리가 쉽게 관찰할 수 있는 갯지렁이류 중 가장 대표적인 분류군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해양저서(바다 밑바닥) 생태계 내에는 참갯지렁이 외에도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다양한 종류의 갯지렁이들이 살고 있습니다. 심지어 개체 수 측면에서 저서 환경을 지배하고 있는 매우 큰 분류군입니다.‘갯’지렁이라는 이름 때문에 갯벌에만 사는 생물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이는 갯벌생태계에서 갯지렁이가 차지하는 비율이 워낙 높아 나타나는 오해입니다. 실제로 이 녀석들은 바위에 붙어 있는 해조류 군락이나 모랫바닥 등 다양한 환경에 서식하고 있으며, 심해 열수구와 같은 극한 환경에서도 자주 발견되는 생물입니다. 쉽게 말해 바닷속 어디에든 갯지렁이가 살고 있다는 말이죠.
우리는 흔히 갯지렁이류라고 지칭하지만 학문적 정식 명칭으로는 다모류라고 부릅니다. 물론 종 수준에서 ‘OO갯지렁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이들은 분류학적으로는 환형동물문 다모강에 속하는 종들입니다. 다모류는 땅 위의 지렁이들처럼 다수의 고리 모양 마디로 이뤄진 몸(동규체절성 구조)을 가지고 있지만 마디에는 다양한 형태의 측각(다리)과 다수의 강모(털)가 발달해 다른 환형동물들과 뚜렷한 차이를 보입니다. 이러한 형태적 특징에 따라 ‘많은(多ㆍpoly-) 강모(毛ㆍ chaeta)’를 가지고 있다는 뜻인 ‘다모류’라 지칭하게 된 것이죠.
꽃에서 괴물까지…다양한 모양의 갯지렁이
앞서 얘기한 대로 다모류는 매우 다양한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히 이들은 특화된 먹이활동에 따라 형태적으로 뚜렷이 구분되기도 합니다. 사냥을 통해 다른 생물을 잡아먹는 대표적인 육식성 다모류인 ‘털갯지렁이류‘는 모래 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조그만 갑각류나 심지어 작은 물고기까지 잡아먹습니다. 완벽한 사냥을 위해 딱딱한 키틴질로 이뤄진 거대한 턱을 가지고 있어, 턱을 벌리고 있으면 마치 영화에서 나오는 외계 괴물처럼 보일 정도로 무서운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바닷속이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나요? 보통 형형색색의 산호류와 해조류들로 이뤄진 바다숲을 떠올리실 겁니다. 이러한 아름다움 속에 갯지렁이도 한몫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대표적인 여과섭식자로 알려진 ‘꽃갯지렁이류’는 바위에 관을 부착해 그 안에서 일생을 보냅니다. 이 녀석들은 물속에 떠다니는 플랑크톤이나 유기물 입자를 걸러 먹기 위해 왕관 모양처럼 펼쳐지는 촉수를 가지고 있습니다. 먹이활동을 위해 관속에서 화려한 색상의 촉수를 펼쳐 꺼내 보이면 마치 바닷속에 꽃이 활짝 핀 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꽃갯지렁이와 같은 여과섭식 방식으로 먹이활동을 하는 ‘석회관갯지렁이류’ 또한 바닷속에서 화려한 촉수관을 펼쳐 보이는데요, 심지어 이들 중 일부 종은 먹이활동을 할 때 마치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보인다고 해서 ‘크리스마스 트리 웜(Christmas tree worm)’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다모류는 또한 저서생물답게 퇴적물 섭식을 하는 종이 다수 포함돼 있습니다. ‘유령갯지렁이류’의 경우 입 주변부에 빗자루처럼 바닥을 쓸어 담을 수 있는 여러 가닥의 잘 발달한 촉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퇴적층 내부에 몸을 숨긴 상태로 이 촉수들을 밖으로 내밀어 바닥에 침전된 유기물 입자를 걸러서 먹습니다. ‘실타래갯지렁이류’ 또한 유령갯지렁이류처럼 촉수들을 이용해 몸을 숨기고 퇴적물을 걸러 먹는 대표적 다모류입니다. 이들은 먹이활동뿐만 아니라 원활한 호흡을 할 수 있도록 마디마다 잘 발달한 실 모양의 아가미를 가지고 있어 땅속에서 꺼내놓으면 마치 실타래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비늘갯지렁이’라 불리는 다모류는 이름처럼 등에 비늘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주변 환경에 따라 비늘의 형태와 색, 무늬를 다양하게 해 천적으로부터 자신을 숨기거나 온몸을 뒤덮은 비늘을 통해 다양한 외부 자극에 노출되지 않도록 몸을 보호합니다. 오뚜기 모양처럼 생긴 ‘오뚜기갯지렁이’는 꼬리 주위에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커다란 방패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항문 주변을 보호해 원활한 소화 활동이 가능하도록 하고, 바닥에 몸을 고정하는 흡착판 역할을 수행하기도 합니다.
일본ㆍ중국에 비해 뒤쳐진 다모류 연구이렇게나 다양한 종류의 다모류가 존재하지만, 우리나라의 다모류에 관한 분류학적 연구는 풀어야 할 숙제가 많습니다. 다모류는 전 세계적으로 약 1만4,000∼1만6,000여종이 기록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우리나라와 가까운 일본과 중국의 경우 약 1,000종 이상의 다모류가 서식하는 것으로 밝혀져 있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에는 불과 약 350여 종에 대한 분포만이 확인됐으며, 이는 우리나라의 다모류에 관한 분류학적 연구가 얼마나 미흡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941년 ‘조선박물학회지’라는 잡지에 ‘털보집갯지렁이‘를 비롯해 10종의 미기록종을 기록한 것이 우리나라 다모류 분류학적 연구의 시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이후로 1989년 총 15목 41과 162속 265종의 기록된 ‘한국동식물도감 31권 갯지렁이류’ 발간을 통해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다모류의 형태와 분류체계에 대한 정리가 이뤄졌지만, 도감 발간 이후 이 분류군에 대한 전문적인 분류학자가 양성되지 못해 다모류의 분류학적 연구는 고비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현재 우리나라의 다모류에 관한 분류 연구는 다른 분류군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한 측면이 있으며, 인접국에 비해 연구 경쟁력에서 서서히 뒤처지게 됐습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는 갯벌, 하구 및 무인도서 등 다양한 생태 환경을 보유하고 있으며, 난류와 한류가 만나 매우 높은 생물다양성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최근 다모류의 생물다양성 연구에서도 분류학자들의 노력으로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우리나라의 다양한 다모류들을 발굴해 나가고 있습니다. 1999년에 일본 훗카이도 인근 해역에서 처음 기록된 ‘뾰족납작수염부채발갯지렁이‘는 2015년에 이르러 이 종의 모식산지와 인접한 우리나라 동해의 암반 조간대에서도 존재가 확인돼, 한국 미기록종으로 기재됐습니다. 또 오뚜기갯지렁이류 중 하나인 ’Sternaspis chinensis(국명미정)’는 2015년 황해의 중국 수역에서 처음 발굴됐지만 우리나라 황해 수역에도 분포하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이러한 경우와 다르게 국내 생태연구를 통해 존재가 알려졌지만 분류학적 기록이 없어 미기록종으로 기록된 경우도 있습니다. ‘고리버들갯지렁이‘는 국내의 여러 생태연구에서 우점종으로 보고돼 있으며 외국에서도 꽤 유명한 유기오염 지표종입니다. 하지만 이 종에 대한 분류학적 기록은 2016년에 들어서야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됐으며, 현재 이 종의 개체군 내에 숨어있는 은둔종(실제로 다른 종으로 구성되지만 형태적으로 구별이 어려운 종)의 실체를 밝혀내기 위한 노력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미기록종들 이외에도 자세한 분류학적 연구를 통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규명된 신종 다모류도 존재합니다. 일본종인 ‘Lagis bocki’는 과거 우리나라 서남해안 연안에서도 서식하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2017년 우리나라의 개체에 대한 분류학적 연구를 통해 ’고리잎빗갯지렁이’ 라는 한국산 신종으로 규명됐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널리 분포하고 있는 ‘Leodice antennata’라는 종 또한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고돼 있는데 이 역시 우리나라의 개체들은 ‘두토막고리털갯지렁’라는 신종으로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결과들은 다모류가 매우 흥미로운 분류학적 연구대상이며, 앞으로 생물다양성 분야에서 높은 연구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모류의 생물자원으로서 가치와 미래최근 생물다양성협약(CBD) 및 나고야의정서(ABS) 발효에 따라 생물자원은 인류 공동자산에서 국가 소유로 인식이 전환되고 있습니다. 특히 ‘유전자원 접근 및 이익공유(ABS)에 관한 나고야 의정서’가 채택됨에 따라 생물자원을 선점하기 위한 자원전쟁 시대가 도래했으며, 이에 따라 다모류의 생물자원으로서 가치가 재평가되고 있습니다.
최근 ’명주실타래갯지렁이’나 ‘긴싸리비유령갯지렁이’에서 피브리노겐(혈전을 구성하는 주요성분) 분해 활성을 지닌 단백질분해효소가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해 앞으로 혈관 청소를 위한 신약의 천연 원료로 이용될 가능성을 보여줬습니다. ‘두토막눈썹참갯지렁이’에서는 새로운 항균 펩타이드가 발견돼 이를 활용한 어류 사료용 첨가제가 개발되고 있습니다. 이 종에서 유기물 분해와 염분 내성을 지닌 공생 미생물을 분리함으로써 유기물로 오염된 양식장 폐수 환경을 정화하는 데 활용하기 위한 연구도 진행 중입니다.
이처럼 다모류는 다양한 분야와 쓰임새로 연구되고 있으며, 높은 종다양성 및 다양한 환경 적응 능력을 통해 다양한 유용대사물질을 함유하고 있을 것이라 예상되는 그룹으로 주목 받고 있습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우리나라의 다모류에 대한 분류학적 연구는 새로운 생물자원 발굴을 위해 매우 적합하며, 나고야의정서에 따른 주변국과 분쟁요소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다모류에 대한 생물다양성 연구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다모류에 대한 분류학적 연구에 더 많은 흥미와 관심을 가져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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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기 국립생물자원관 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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