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인사대천명’을 가훈으로 정한 강창원 선생은 자신의 호 소지(昭志)처럼 평생을 좋아하는 글씨를 즐겨 쓰면서 맑고 밝게 살았다.
한 세기에 가까운 오랜 세월을 서예에 매진해 온 소지도인(昭志道人) 강창원 선생(사진)이 지난 13일 LA에서 선종했다. 향년 101세.
강창원 선생은 지난 해에 작고한 부인 강정숙씨와의 사이에 2남(희동, 희남) 3녀(레지나,경희,인희)의 자녀와 7명의 손자 손녀, 5명의 증손자 손녀가 있다.
소지도인은 1918년 서울 종로에서 치과의사 강태영씨의 둘째 아들로 출생해 1925~1945년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거주하면서 수학하다 해방후 귀국했다. 10세의 강창원은 당시 일제의 폭정을 피해 북경에 와 있던 이순신 장군의 10대손 독립투사 이세민에게 안진경의 ‘쌍학명첩’(雙鶴銘帖)을 배웠으며 3.1운동을 중국에 알린 AP 통신원 한세량으로부터 유공권체를 수학했다. 15세때 중국의 석학 양소준으로부터 본격적인 서예수업을 시작하게 됐다. 이런 선생들에게 배운 덕택에 강창원의 글씨는 독립투사들의 정신과 기백이 배어있으며 대륙의 기상이 담겨있다. 말년에는 이순신의 나라사랑의 마음이 잘 표현된 ‘한산도 야음’이라는 한시를 생각날 때마다 썼다고 한다. 그는 특히 당나라 시대에 발전했던 해서체에 두루 능했다.
이후 북경 사범대학교 중문과에서 수업한 강창원은 강정숙씨와 1941년 결혼후 해방이 되자 서울로 돌아와 중국어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KBS국제방송 초대 중국어 아나운서로 활약했다. 또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중국군 고위간부의 통역도 담당했다. 그가 대한민국 정부수립 초기당시 재무부 산하 김포세관장으로 일하고 있을 때의 일화이다. 정부의 한 고위 공직자가 연루된 국보급 보물이 일본으로 밀반출 될 위기에 높여 있었는데, 그가 상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포장을 풀고 개봉을 시키면서 밀반출 시도 사실이 탄로났다. 소중한 보물을 지킨 덕택에 그는 정부로부터 큰 포상을 받았다고 한다.
1956년 대한민국의 서예연구단체인 동방연서회 창립발기인으로 참여하면서 해서와 행서의 전공강사로 활약한 강창원은 1962년 9월에는 ‘동방연서회 회고’ 집필위원에 이어 1966~1977년 성균관대학교 성균서도회의 강사를 지냈다.
그의 첫 개인전 대표작으로 ‘광개토대왕릉비 비문’이 꼽히는 데, 안진경체를 바탕으로 한 특유한 자신만의 해서로 쓴 이 작품은 가로 384cm, 세로 210cm나 되는 대작으로 한 독지가가 이 작품을 사들여 박정희 대통령이 있던 청와대 영빈관에 기증했다. 박정희 대통령도 그의 대범한 붓글씨를 좋아해 그 후에도 그의 작품을 많이 사들여 청와대에서 소장했다고 한다.
그는 또한 전문 5,440여자가 넘는 긴 내용의 대승경전인 금강경을 가로 70cm, 세로 137cm의 전지 103장에 하나의 작품으로 썼다. 필생의 역작인 금강경은 강창원 특유의 체력과 필력, 자신감이 없이는 쓸 수 없는 글로 평가되고 있다.
1970년대 초반 독립서실인 임지헌에서 동인서예전을 개최하면서 왕성한 작품활동을 벌인 그는 1977년 LA로 이민을 와서 이곳에서도 제1회 개인전을 열면서 본격적으로 미주한인사회에 서예를 보급하게 된다.
그는 LA에서도 1988년 고희전, 1997년 희수전, 2006년 미수전 등을 펼치면서 평생 작품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다.
강창원 선생의 둘째 아들인 치과의사 강희남씨는 “아버님이 워낙에 강직하고 청렴하셨다”며 “오로지 서예를 즐기셨기 때문에 국전 등에도 출품을 안하시고 공직생활도 일찍 접고 재야의 은자로 남길 원하셨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의 호 ‘소지’처럼 평생을 좋아하는 글씨를 즐겨 쓰면서 맑고 밝게 살기를 원했다.
100세에 전시회를 열겠다는 그의 꿈은 마침내 이뤄져 2017년에는 서울 인사동 희수화랑에서 여러 서체의 글씨 70여 점을 선보인 ‘소지도인 100세 기념 서예전’이 열리면서 한국에서 열린 최고령 작가의 서예전이란 기록을 세웠다.
강창원 평전 ‘추사를 따라 또 다른 길을 가다’를 펴낸 소지도인의 수제자 김종헌씨는 “강창원은 세속적 가치와는 담을 쌓고 오로지 붓글씨만을 쓰고 즐기는 것에 평생을 바쳤으며 추사 김정희 이후 대한민국의 가장 위대한 서예가이다”라고 평가했다.
아들 강희남씨는 “아버님은 평소에 맨손체조, 물구나기 서기 등 운동을 많이 하고 소식을 하는 가운데 절제된 생활을 하셨으며 워낙에 낙천적인 성격이어서 장수하신 것 같다”며 “100세에 가까운 나이에도 하루종일 서예를 즐겼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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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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