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낳은 피아노의 거장 백건우의 LA 공연이 이제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오는 22일(금) 오후 7시30분 LA 다운타운 콜번스쿨(Colburn School) 내 지퍼홀(Zipper Hall)에서 ‘백건우 & 쇼팽’ 피아노 리사이틀을 갖는다. 1946년생인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10세 때 독주회를 통해 데뷔한 뒤 63년 이상의 세월을 연주자로서 쉼 없이 달려오고 있다. 반세기가 넘는 세월동안 순수한 음악인으로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켜온 그에게 음악은 언제나 경이로운 존재이자 삶의 원동력이다. 한국일보 미주본사 창간 50주년 기념 특별기획으로 마련된 이번 리사이틀에서 일정 기간 한 작곡가를 집중 탐구하는 스타일이라 ‘건반 위의 구도자’라는 별명까지 얻은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그가 “쇼팽 본인을 가장 잘 말해주는 작품”이라고 부른 야상곡을 주제로 ‘피아노의 시인’ 쇼팽과 친밀한 대화에 나선다.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이번 LA 공연을 필두로 내달 7일과 11일 한국 예술의전당에서도 ‘백건우 & 쇼팽’ 연주회를 가질 예정이다. 연륜과 열정의 예술가 백건우의 연주를 LA에서 직접 감상하실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가 될 이번 리사이틀의 연주곡들을 피아니스트 김주영의 해설로 미리 만나본다.
■즉흥곡(Impromptu) 2번 F#장조, 작품번호 36
1839년의 작품인 즉흥곡 2번의 도입부는, 어느 시인이 은근한 흥밋거리로 가득 찬 오솔길로 들어서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차분함과 음울함을 은유하는 베이스 라인의 움직임은 야상곡 풍인 동시에 망설임과 수줍음을 나타내고 있으며, 달콤한 선율선은 끝맺지 못한 사랑노래처럼 애틋하다. 중간부는 분위기를 바꿔 행진곡의 악상이 전개되는데, F#장조의 으뜸조에서 약간은 동떨어진 D장조로 전개되는 무곡 풍의 에피소드다. 후반부 재현은 32분음표의 명랑한 움직임이 인상적인데, 그 자유로운 악상은 기술과 해석 양면에서 매우 까다롭다.
■야상곡(Nocturne) 5번 F#장조, 작품번호 15-2쇼팽의 야상곡(녹턴)이 모두 깊은 사색의 정서를 띄고 있지만, 그 중 5번, F#장조는 이른바 ‘청년의 사색’이라 할 만한 악상을 지닌다. 흘러내리는 음형이 아름다운 인상을 남기는 테마는 후반부에 가서 눈부시게 화려한 반음계적 장식으로 등장해 뇌리에 각인된다. 다섯잇단음표의 리듬을 지닌 채 발전하는 중간부는 특유의 불안한 정서와 충동적인 폭발이 하이라이트를 이루지만 이내 부드러운 잠의 세계로 쓰러지고 만다.
■야상곡 7번 c#단조, 작품번호 27-1 스쳐가는 상념의 힘으로 작품을 쓰는 작곡가는 많지만, 그 절묘한 찰나의 감정을 잔인할 정도로 확대시켜 세세한 가닥들을 밝혀내는 사람은 흔치 않다. 야상곡 7번, c#단조가 지닌 정서는 한 마디로 ‘우울함’인데, 감정의 전후 없이 오직 그 상태만을 확대시켜 더욱 매력적이다. 음의 높낮이가 심하지 않은 멜로디는 상대적으로 폭이 넓은 반주를 통해 효과적으로 포장된다. 중간부에서 나타나는 응집된 에너지의 분출 역시 깊이 뿌리 박힌 베이스 라인의 역할이 중요하며, 살짝 나타나는 폴란드 무곡의 편린도 흥미롭다.
■환상 폴로네이즈(Polonaise-Fantaisie) Ab장조, 작품번호 61 19세기 폴란드가 겪어야 했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오직 음악으로만 그 슬픔과 울분을 나타내야 했던 쇼팽이 스스로를 얼마나 자책했을까. 나라의 이름이 송두리째 사라지고 이리저리 나뉘는 수모를 겪었지만, 폴란드의 정신은 쇼팽이 남긴 폴로네이즈들 속에 생생하다. 1846년 완성된 환상폴로네이즈A♭장조는 혈기 넘치는 에너지와 조국의 영광을 그려낸 이면에, 밖으로 드러내지 않은 마음 속 춤과 결국 돌아가지 못한 폴란드에 대한 향수를 담았다. 간헐적으로 드러나는 폴로네이즈의 무곡 리듬도 매력적이지만 자꾸 발걸음을 멈추고 보이지도 않는 환상을 찾아 헤매는 작곡가의 감성은, 그 해 가을 영원한 이별을 고한 연인 조르주 상드와의 아픈 인연을 애써 잊으려는 몸부림처럼 들리기도 한다.
■야상곡 4번 F장조, 작품번호 15-1 천재 작곡가가 지닌 감성, 그 경우의 수가 얼마나 될지 상상도 힘들지만야상곡4번 F장조는 티없이 맑고 순수한 동심을 드러낸 걸작이다. 아직 잠이 덜 깬 듯한 고요함이 지배적인 도입의 멜로디는 질질 끄는 듯한 왼손 화성 반주로 섬세하게 꾸며지며, 그 안의 뉘앙스 변화도 한없이 달콤하다. Confuoco(불과 같이)라는 지시어가 붙은 중간부의 느닷없는 열기는 작곡가 특유의 복잡 미묘한 화성변화와 더불어 짙은 인상을 남긴다.
■야상곡 13번 c단조, 작품번호 48-1작은 구조와 한정된 아이디어만으로도 깊은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었던 작곡가가 쇼팽이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야상곡13번 c단조이다. 대곡과 스케일 큰 작품을 선호하는 피아니스트라도 반드시 거치고 넘어가는 문제작이기도 한 이 작품은 강하게 느껴지는 스토리텔링이 매력적이며, 이미 세 개의 발라드를 완성한 후인 1841년의 작품이라서 그런지 작은 발라드를 듣고 있는 느낌이다. 깊은 비장미를 품은 도입의 주제는 그 기분을 그대로 품은 채 마무리되고, 작곡가 특유의 코랄 풍 진행은 옥타브 장식을 더해 스케일을 넓힌다. 이어지는 주제의 재현은 화성과 리듬이 모두 복잡하게 변해 관현악적 효과마저 느껴진다.
■화려한 왈츠(Valse brillante) F장조, 작품번호 34-3후반부 첫 곡인 화려한왈츠 F장조, 작품번호 34-3은 타이틀처럼 ‘화려한’ 동시에 사랑스러운 소품이다. 흔히 ‘고양이’라는 별명이 붙는 이유는 처음 듣는 이라도 공감할 수 있는 명랑한 악상 때문이다. 세 박자 안에 네 개의 8분음표로 된 헤미올라(hemiola; 2박자 대신에 3박자, 3박자 대신에 2박자를 쓰는 변형 박자) 리듬이 이어지는데, 이토록 단조로운 악상은 쇼팽의 피아니즘에서는 오히려 이색적이다. 크게 보아 세 개의 왈츠가 들어있으며, 동적인 첫 왈츠와 대조적으로 두 번째와 세 번째 왈츠는 멜로디와 루바토(rubato; 자유로운 템포)가 주된 음악적 아이디어로 쓰이고 있다.
■왈츠(Valse) Gb장조, 작품번호 70-11833년경에 구상되었다고 알려진 왈츠G♭장조는 쇼팽의 유작으로 작품번호 70-1의 번호를 달고 있다. 역시 젊음이 넘치는 악상인데 moltovivace(매우 빠르게)의 지시어와 어울리는 넓은 도약의 멜로디는 작곡가가 상상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을 담고 있다. 빠른 템포가 조금 누그러져 나오는 중간부에서는 3도 화성 진행으로 진행되는 선율이 귀족적 정서를 강하게 풍겨 인상적이다.
■화려한 대왈츠(Grande Valse brillante) Eb장조, 작품번호 18쇼팽의 왈츠집 악보 첫 머리를 차지하고 있는 화려한 대왈츠 E♭장조, 작품번호 18은 1831년, 그가 잠시 빈에 체류할 때 만들어졌다. 때마침 이루어진 폴란드의 새로운 국토 분할로 인해 빈에서의 활동이 곤란해지기도 했지만, 생활을 위해 작곡을 해야 했던 쇼팽은 무도회장의 ‘빈 왈츠’를 쓸 자신이 없다고 아버지에게 편지로 고백했다. 시종 흥겨운 리듬과 창의력 넘치는 악상이 지루할 틈 없이 나타나는 걸작이지만, 작곡가의 말 대로 어디까지나 춤보다는 감상을 위한 왈츠라고 하겠다.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지는 이 곡은 네 개의 왈츠가 메들리 형식으로 이어지며, 후반부 장대한 코다는 부제인 ‘그랜드’에 걸맞은 화려함을 띄고 있다.
■야상곡 16번 Eb장조, 작품번호 55-2쇼팽의 후기작들은 말하고 싶지만 결코 꺼낼 수 없는 내재된 충동이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경우가 많은데, 야상곡 16번 E♭장조도 그런 특징을 지니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매우 강한 즉흥성을 띄고 있으나 교묘한 내성의 움직임과 선율로의 역할마저 담당하고 있는 왼손의 자유로운 움직임 등은 성숙한 작곡기법의 좋은 예라고 하겠다. 종결부의 처리도 세련되어 있는데, 특히 다섯잇단음표로 과도하지 않은 루바토를 이끌어내는 창작기교는 그야말로 매혹적이다.
■야상곡 10번 Ab장조, 작품번호 32-2야상곡 10번 A♭장조는 온갖 화사한 색채로 꾸며진 동화책을 보듯 아기자기한 동시에 솔직 담백한 감성이 인상적이다. 달콤하고 편안한 정서를 지닌 첫 주제는 그다지 많은 변화를 겪지 않고 중간부로 넘어가는데, 화성의 윗 성부를 차지하는 멜로디는 이내 격정과 멜랑콜리로 변화하여 매력을 발산한다. 재현부는 첫머리의 반복으로, 다만 좀 더 강하고 짙어진 악상의 처리가 관건이다.
■발라드(Ballade) 1번 g단조, 작품번호 23영화 ‘피아니스트’의 주인공 브와디스와프 슈필만은 절체절명의 순간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쥔 독일 장교 앞에서 쇼팽의 발라드1번 g단조, 작품번호 23을 연주해 폴란드의 피아니스트라는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증명한다. 영화적 연출이 얼마나 가해졌는지 모르지만, 그만큼 이 곡은 쇼팽 예술 전체의 핵심인 동시에 쇼팽을 연주해야 하는 피아니스트의 실력을 검증하는 걸작 중의 걸작이다. 쇼팽이 이 곡을 쓰기에 앞서 영향받았던 아담 미키에비치의 서사시는 14세기 리투아니아와 독일 기사단과의 항쟁을 그린 내용이었던 바, 조국을 그리워하고 끊임없이 염려했던 작곡가의 마음이 투영된 이 곡의 절절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전곡은 자유로운 소나타 형식으로 볼 수 있으나 작곡가의 시상은 한정된 틀을 너끈히 뛰어넘는다. 고뇌와 안식을 은유하는 두 개의 주제와 눈부신 기교가 인상적인 경과부, 생략된 재현부와 장대한 코다에 이르기까지 군더더기 없는 낭만시대 최고의 피아니즘이 펼쳐진다.
●백건우 공연 가기 전 알아야 할 것 백건우 피아노 리사이틀은 22일 (금) 오후 7시30분 한인들에게도 친숙한 LA 다운타운 콜번스쿨의 ‘지퍼홀’(200 S. Grand Ave. LA)에서 열리며, 관객들은 7시15분까지 공연장에 입장해야 한다.
주차는 콜번스쿨 건물과 인접한 3곳의 유료주차장에 할 수 있다.
주차장 위치 ▲Athena Parking(140 S. Olive St.) ▲디즈니홀 주차장(111 S. Grand Ave.) ▲CAL 플라자 주차장(351 S. Grand A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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