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자인 나는 위령성월인 11월이 되면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생각하게 된다. 특히 11월의 둘째 날은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이라 특별 미사를 드린다. 봉헌 봉투엔 기억나는 사람의 이름을 쓰라고 열두 줄이나 빈칸이 있다. 한 줄씩 이름을 써나갈 때마다 그들의 생시 모습을 떠올리고, 그 목소리, 행동들을 되새겨보았다.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그립고 슬프지만 미소도 지어졌다. 짧거나 길거나 생을 다 마치고 이제는 안식에 든 그들의 평안함이 느껴졌던 때문일까.
내가 사는 곳 가까이에 있는 캘리포니아 첫 번째 미션엔 그 특별한 미사를 위해 제대 앞을 꽃으로 치장했다. 단을 쌓아 하얗고 노란 꽃으로 장식한 그 모습은 언뜻 어린 시절 보았던 꽃상여를 생각나게 했다. 오래전 할머니가 타고 떠나셨던 하얀 꽃상여, 부모님도 그렇게 꽃으로 단장한 상여에 마지막 몸을 누이셨던 것이 떠올랐다. 장엄한 미사 속에서 촉촉이 젖어오는 눈가는 그리움이기보다는 함께함의 기쁨이었다. 가보지 않은 사후 세계는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적어도 기도하는 그 시간만은 그들이 내 곁에 와 있는 것만 같았다. 백인 신부님의 강론 중엔 죽은 이들과 우리의 관계가 결코 끊어진 게 아니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보고 만질 수 없을 뿐 그 인연은 하늘과 땅에서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나 또한 그 세계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지 않은가. 죽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보면 우리는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삶이란 생존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잘 죽기 위해 걸어가는 여정이라고 말해본다.
최근 읽게 된, 암으로 죽음을 앞둔 이어령 선생의 마지막 인터뷰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다시 정리시켜 주었다. 그는 죽음의 장소는 ‘탄생의 그곳’이라고 하는데,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결국 느껴지는 게 신의 존재라고 했다. 시대의 석학인 그도 결국은 신을 인정하는 것이라 생각하니 떠오르는 문장이 하나 있었다.
‘지성의 끝에는 신이 있다’ 는 글귀는 프랑스 철학자 에티엔느 질송의 책을 읽다가 발췌돼 내 머릿속에 수십 년 동안이나 맴돌고 있다. 그 말은, 인터뷰를 한 기자가 말한 내용과 맞닿아 있었다. ‘과학을 모르면 무신론자가 되지만 과학을 깊이 알면 신의 질서를 만난다.’ 두뇌 활동 레벨이 오를수록 우리는 신의 질서에 가까워지고 결국 영성의 세계에 이른다는 말일까.
죽음은 영성적으로 풀이하지 않으면 그저 육체 활동의 중지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끝나고만 말 생들이라면 우리는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눈물을 흘릴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어쩌면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그만큼, 그들은 육신은 없으나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열 사람이 기억하면 그 열 사람의 생명만큼 더 살고, 백 사람이 기억하면 그 백 사람의 생명만큼 그가 더 지상에 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 속에 죽은 이들은 함께하며, 우리에게 남겨진 생전의 말과 표정 그 생각들로 삶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때론 떠난 사람들의 말이 생의 지표가 되고, 위기의 순간에 문득 떠올라 지혜를 주기도 한다.
어느 저녁 지인 몇 명이 모여 앉았다가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한 사람을 얘기했다. 숨을 거두기 몇 시간 전까지 말은 못해도 눈으로 너무나 많은 얘기를 하더라며, 끝까지 살고 싶어 하더라고 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살고 싶은 건 그저 본능일까. 불길이 뜨거우면 피하거나 파도가 밀려오면 도망가는 것처럼, 지금은 확연히 알 수 없는 죽음은 누구에게나 그렇게 두렵게 다가오는 것 같다. 그러나 그 두려움의 본능을 이겨냈던 성자들은 얼마나 아름다운 죽음을 맞았던가. 인간의 삶이 죽기 위해 사는 것이라면 잘 죽는 것처럼 복된 일도 없으리라.
이렇게 죽음에 대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부고가 전해져 온다. 익히 아는 문우의 죽음이다. 물살이 덮치듯 갑자기 찾아온 그 마지막 순간을 그는 잘 받아들이고 떠났을까. 이어령 선생의 말처럼 그는 지금 그 탄생의 시점으로 달려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 잠시 눈을 감고 그의 안식을 빌어본다.
11월, 스산한 기운을 느끼며 죽음의 의미 속에 삶을 생각한다. 지금은 더 달려가야 할 때, 영근 삶이 열매를 맺을 때 신의 질서에 편승할 수 있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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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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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태초부터 가지고 있던 환생에 대한 믿음이 점점 사실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심지어 기독교의 영지주의파도 환생을 믿었습니다. 죽음을 새로운 삶의 준비로 봐야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