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처음 접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과외공부 그룹의 소풍을 다녀오니 집안이 분주했다. 오래 병환 중이시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이었다. 가까이 사는 친척들과 이웃들이 와서 장례준비를 돕고 있었다. 문상객들로 집안이 며칠 벅적벅적한 후 할머니는 멀리 남쪽 고향의 선산에 묻히셨다.
‘죽음’을 다시 접한 것은 그로부터 수십년 지나서였다. 직장동료나 친지 등 우리 세대의 부모세대가 세상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 사이 장례문화는 바뀌었다. 집 마당에서 초상을 치르던 풍습은 사라지고 상업적 장례식장이 장의의 무대가 되었다. 층층이 집들이 포개진 아파트가 주 주거공간으로 바뀐 데 따른 실용적 대안이었다. 삶의 길이 다하면 그곳이 죽음, 살아가는 모습이 바뀌니 이 세상 떠나는 모습도 바뀌었다.
지난달 세 번 연달아 장례식에 참석했다. 전·현직 동료들의 부모님 장례식이었다. 장례예배 순서지에 쓰인 고인의 약력을 보면서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내 아이들이 내 약력을 어찌 알까, 간단하게 기록해둬야 하는 게 아닐까?”하는 것이었다. 이어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생각이 미쳤다.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장례문화, 부고를 내고 화환이 줄지어 서고 조의금을 주고받는 광경은 조만간 ‘멸종위기’를 맞으리라는 것이다. 장례예배 순서지의 약력을 걱정할 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라는 깨달음이다.
미주한인사회는 지금 이민 1세들의 시대를 마감하고 있다. 언어와 정서, 사고방식이 ‘한국인’인 세대는 나이 들었다. 그리고 이제 1세 한국어권과 2세 영어권을 가르는 격절의 경계에 서있다. 2세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고 우리 입맛을 길들이며 한인 정체성을 심어주려 애를 썼지만 그들은 그만큼의 한인일 뿐이다. 1세대 생활권으로부터 문화적 물리적으로 멀다.
예를 들면 주류사회에 뿌리박고 일하며 타주/타국에 사는 자녀들이다. 글로벌 시대에 많은 2세들이 그러하다. 한인사회와는 부모를 통해 간접 연결되고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연결고리는 끊어진다. 홀로 남았던 모친/부친마저 사망하면 누구에게 부고를 할지 이들이 어떻게 알겠는가. 2세가 치르는 1세 장례식은 가족과 몇몇 가까운 친지만 모이는 작은 의식, 조용한 가족장이 자연스런 귀결이다.
의식의 변화는 이미 일어나고 있다. 미국생활 반백년인 한 지인은 이 세상 하직 플랜을 일찌감치 세워두었다. 매장 대신 화장을 하고 장례식 없이 추모파티를 하라고 자녀들에게 글로 남겼다.
“산 사람들이 살 땅도 모자란데 죽은 사람이 넓은 땅을 차지하면 되겠어요? 자녀들이 찾아오는 건 처음 몇 개월, 그 다음에는 기껏해야 1년에 한번 꽃 들고 오겠지요.”
자녀가 타주에 살고 있으면 매장은 더욱 의미가 없다. 묘지에 가려고 비행기 타고 오기는 어렵고, 그래서 자주 찾지 못하면 죄책감이 따른다. “매장은 자녀들에게 상당히 부담을 주는 일”이라고 그는 말한다. 자신이 죽으면 화장해서 재를 바다에 뿌리고, 한 달쯤 후 친구들을 불러 파티를 하며 자신과의 즐거운 추억들을 나누라는 것이 엄마로서 그의 주문이다.
그의 이런 결정은 친정어머니의 영향이 없지 않다. 한국의 고향마을에 들어서면 바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 그의 친정 선산이라고 한다. 축대를 높이 쌓아올린 가족묘지에는 조부모와 아버지의 세 분 묘소가 있고 그 옆에 어머니 묘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불교신자였던 어머니는 자신이 사망하면 자신의 시신과 함께 다른 세분도 모두 화장해 재를 선산에 뿌리고 묘지를 없애라고 명했다.
“자식이 부모 묘를 팔 수는 없으니 당신이 결정해야 할 일이라고 하셨어요. 한국의 남동생이 어머니 뜻을 따르고는 그 자리에 진달래 300그루를 심었지요.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 이제는 묘지 대신 꽃동산이 눈에 들어와요.”
어머니는 물론 그의 가슴에 묻혔다. 찾아갈 필요도 없다.
매장이 줄고 화장이 늘어나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이다. 한곳에 정주하지 않고 자주 이주하는 생활방식, 땅 부족문제, 상대적으로 저렴한 장례비용 등이 화장 증가요인이 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화장 비율이 80% 이상, 미국에서는 50% 이상이다.
아울러 두드러진 현상은 작은 장례식. 초고령화 사회인 일본에서는 전체 장례의 3분의 1이 가족장이다. ‘부모 90대 자녀 70대’ 가족이 많으니 모두 은퇴해 대인관계의 폭이 넓지 않다. 장례식에 부를 사람도 올 사람도 별로 없다. 조용히 가족끼리 장례를 치르는 것이 일반화하고 있다.
규범과 전통의 해체는 21세기의 한 특징. 미국에서는 생전 장례식도 늘고 있다. 죽기 전에 친지들을 불러 이별 파티를 하는 것으로 장례식을 대신하는 것이다.
지구별에서 함께 한 인연들과 어떻게 헤어질 것인가. 그들 가슴에 어떤 존재로 남고 싶은가. ‘화장 혹은 매장’부터 따져보며 가장 자신답게 이 세상 떠날 준비를 해보자. 죽음을 준비한다는 건 삶을 들여다보는 일. 무덤덤하게 흘러가던 날들이 의미로 반짝이게 된다.
junghkwon@koreatimes.com
<
권정희 주필>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총 3건의 의견이 있습니다.
떠날때를 미라 알면 호화롭게 칭구들을 모두 불러 멋지게 잔치를 벌리고 더 이상 찾아오지 말라고 하고 조용히 떠나면 얼마나 좋겠나요. 근데 죽음이 어느날 갑자기 찾아 오니 준비 없이 갈수밖에요. 우물쭈물하다가 이렇게 될줄 알았다라는 귀절이 항상 머리에서 맴 도는군요.
좋은 현상입니다. 삶에 대한 존경심은 없으면서 죽음에 대해서는 유별나게 요란떠는 위선이 점차 없어지고 있습니다.
사 는 동안 적어도 자기 할 일 열심히 최선을다하면 가는길 걱정없이 맘 놓고 곳바로 가벼운 마음으로 잘 갈수 있으리라 생각이 드는군요.